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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Aug 17. 2022

칠드런 오브 맨

우리들의 해방 일지: 남편 55일째

8월 17일 수요일 둘째가 처음으로 맞아본 빗방울


내가 수영을 다니게 되면서 약간의 제약이 생겼다. 수영장에 가는 월화목금 오전 10시 타임, 앞 뒤로 대략 9시 30분부터 11시 10분까지는 나와 아내 모두 스케줄을 잡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 아침 시간대에 해야 하는 스케줄이라면 되도록 수요일에 하게 됐다.


그래서 수요일인 오늘 둘째의 B형 간염 예방접종을 했다. 참고로 아기들은 크면서 정말 끊임없이 계속해서 다양한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 내가 어릴 때보다 예방접종의 종류가 굉장히 많아졌고, 국가에서 어린이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체계화되면서 부모가 잘 모르거나 잊어버려도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아기가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을 잘 챙겨준다. 근데 예방접종 주사는 되도록 아침 일찍 맞는 것이 좋다. 만약 주사를 맞고 추적관찰을 하는 와중에 뭔가 이상 반응이 생기거나, 혹은 열이 확 오르는 등 추가 조치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에 주사를 맞으면 시간 상 아무래도 밤중에 이상 반응이 올 수 있으니 대처하기가 더 힘들다.


어쨌건 그래서 첫째 등원 후에 아내와 내가 둘 다 채비를 하고 둘째를 슬링에 넣어서 안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하필 집에서 나오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둘째는 처음으로 제대로 맞아보는 바깥바람이 마냥 신기한지 주변과 하늘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조리원으로 갈 때나 조리원에서 집으로 온 날은 거의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차에 탔으니까 바깥공기를 느껴볼 새도 없었을 것이다. 비까지 오니 더 신기할 만했다.


둘째를 품에 안고 비바람을 맞추지 않기 위해 우산을 낮게 씌우고 조심스레 웅크리고 걸어 다니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우리 둘째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내가 그런 모습을 보더니 영화 <칠드런 오브 맨> 같다고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06년 작품인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인류가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다. 온 세상이 '노 키즈 존'이 되면 시끄럽게 떠드는 애도 없고 식당에서 말썽 부리는 아이, 비행기에서 우는 아기도 없으니 모두 안락하고 방해받지 않는 생활을 즐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기가 없다는 건 이제 인류에게 다음 세대란 없다는 것이며, 지구에서 인간이 멸종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신생아를 모든 사람이 경외심을 갖고 추앙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아내가 바로 그 장면을 떠올리며 말한 것이다.


사실 애 둘 아빠인 나로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울 때가 많다. 다섯 살 아들은 어딜 가나 얌전히 있지 못하고 산만하게 움직인다. 44일 된 딸은 물론 오늘이 첫 외출이었지만 앞으로 당분간 어딜 가나 울고 보챌 것이다. 애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통제한들 못 움직이게 묶어놓고 입을 틀어막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일명 '맘충'소리 듣지 않기 위해 아내와 나는 부단히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은영 박사님이 출연한 '애티켓'캠페인에 대한 싸늘한 반응이나, 최근 제주행 비행기에서 아기가 운다며 난동을 부린 사람의 사건 같은 것을 보고 들을 때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 동네 민심은 아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오늘 내 품에서 얼굴만 빼꼼히 보이는 둘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고, 평소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첫째가 쳐다보면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이웃들도 많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어딜 다녀도 애를 노려보며 윽박지르는 사람보다는 반달 웃음을 짓는 분들이 더 많다. 아직은 인류가 멸종되지는 않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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