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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09. 2022

나를 위한 바쁨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5일째

7월 8일 금요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이다가 더워짐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일기는 지양하려고 했지만 오늘은 예외다. 오늘은 스스로 느끼기에 올 한 해 중에서 거의 가장 바쁜 하루였던 것 같다. 보통 바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어감을 담고 있다. 바쁜 건 쉴 새가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그만큼 시간에 쫓기고 피곤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건 보통 바쁜 것은 일 때문이고, 일은 대부분 남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늘 나의 하루는 이랬다.


8시.

기상해서 첫째 깨움. 키 크는 쭉쭉 스트레칭을 해주고, 잠이 덜 깬 아이가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는 사이 아침식사 준비. 같이 아침을 먹고 아이 세수와 양치질을 시키고 옷 입히고 나는 눈곱만 겨우 뗀 얼굴로 출발.


9시.

놀이터에서 유치원 버스 기다렸다가 아이 버스 탑승시킴. 좋아하는 친구 A와 같이 못 앉아서 시무룩한 아이를 창밖에서 달래며 버스 배웅.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던 물건 리스트대로 가방 한가득 챙겨서 조리원 출발 준비.


10시.

자전거 타고 출발. 조리원 가는 길에 귤 한 박스까지 사서 조리원에 물건 배달. 다른 산모들은 아마 내가 배달부인 줄 알았을 듯.


10시 30분.

주민센터로 가서 출생신고. 출생신고는 기재할 것이 정말 많고 한 번 잘못하면 큰 문제가 되는 만큼 꼼꼼히 여러 번 체크해야만 함. 출생신고 완료하고 뽑아준 4인 가족 등본 들고 다른 창구로 가서 복지 신청. 현재 우리 서울시 및 우리 구에서는 '첫 만남 이용권'이라는 이름의 바우쳐 200만 원을 줌. 그 외에도 영아 수당, 아동수당 같은 것들이나 출산가정 전기요금 감면 혜택 등이 있고, 이번 7월 1일 이후 출산부터 서울시에서 교통비 지원 70만 원도 추가됨. 어쨌거나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이것저것 복지가 늘어나면 나쁠 건 없음.


11시 30분.

조리원 재방문해 주민센터에서 아내가 직접 써서 내야 한다는 문서 전달. 서브웨이로 가서 점심 먹을 것 포장. 서브웨이 옆에 지나가는 길에 미술놀이교실 배너를 보고 연락해서 첫째 내일 체험수업 예약.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들러 한전에 출산가정 전기요금 감면 신청했다고 전달.


12시.

점심 식사하며 유튜브로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브로커> 리뷰 시청


12시 30분.

빨래 개며 유튜브 마저 시청


1시.

회사에 연락해 둘째 대상으로 쓸 육아휴직 추가 신청. 언젠가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나는 첫째 대상으로 3개월, 둘째 대상으로 3개월을 사용할 예정임. 미리 다 문서를 제출했는데, 다만 둘째의 경우 이름과 주민번호가 있어야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출생신고 후에 등본 첨부해서 다시 신청해야 했음.


1시 30분.

아내와 상의해 첫째 체육놀이교실 체험수업 예약. 다음 주 월요일. 일요일에 뭘 할지를 생각하다가 처가댁 식구들과 통화하며 주말 일정 조율. 그러고 있는데 아내가 주문했던 트롤리(바퀴 달린 3단 수납장, 보통 미용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갓난아기 있는 집에서도 씀)가 도착해 들여놓음.


2시.

유튜브 제작. 원래 매주 토요일 오전에 업로드하니까 오늘까지 다 만들어야 함. 이번 주는 둘째 출산을 하고 정신없어서 결방할 줄 알았는데 어찌어찌 거의 다 만들었지만 오늘 만들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30분밖에 하지 못하고 밤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보류.


2시 30분.

한의원 진료. 내일까지만 진료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여 마지막으로 빡세게 치료 받음.


4시.

아돌라에서 스타벅스 한잔. 테이크아웃. 첫째 유치원 선생님과 통화. 다행히 이번 주에 동생이 태어나고 엄마도 못 보는데 유치원에서는 잘 지낸다고 해서 안심. 집에 왔더니 그 사이 우리 회사에서 보낸 과일바구니와 아내 회사에서 보낸 서류 등기가 각각 도착해 있었음. 대충 들여놓고 하원 마중 나갈 준비.


4시 30분.

첫째 유치원 차 도착 시간. 차에서 내리자마자 쉬가 마렵다고 해서 마구 달려서 경비실 옆 화장실에 갔더니 갑자기 응가까지 하기에 당황. 첫째가 친구들과 노는 사이 놀이터 배회하며 다른 부모님들과 대화. 전에 다른 일기에도 언급했지만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애가 노는 걸 주시하면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힘듦.


5시 30분.

놀이터에서 올라와 첫째와 과일바구니 정리하고 샤워. 물론 첫째는 과일을 꺼내어서 구경하고 아무 데나 놓을 뿐이고 정리는 내가 해야 함.


6시.

샤워. 물론 내 샤워가 아니라 아이 샤워임. 샤워하면 머리 말려주고, 얼굴이랑 땀띠 난 곳에 로션 발라주고 갈아입을 옷 골라줘야 함. 그나마 옷은 혼자 입을 수 있음.


6시 30분.

나는 트롤리를 조립할 테니 너는 넘버 블록 만화를 보거라. 에어프라이어 너는 피자를 만들거라.


7시.

피자로 저녁 식사.


7시 30분.

넘버 블록 놀이. 11부터 20까지 더하면 155라는 것을 알았다.


8시.

내일 갈 잉글리시에그 영어 놀이 센터 수업 숙제. 숙제라기엔 그냥 간단한 선 긋기와 색칠공부와 종이접기 등을 응용한 형식이지만 보통 1시간 정도 소요됨. 다 하고 가위질해서 생긴 부스러기까지 알뜰히 청소. 첫째가 청소기는 꼭 자기가 돌린다고 해서 그렇게 해줌.


9시.

치카치카하고 본격적인 잘 준비. 우유 먹고 책 읽기인데, 졸린데 엄마가 없어서 떼쓰기 시작. 엄마랑 영상 통화하고 음성메시지 주고받기 몇 번 하고 겨우 좀 취침 준비 모드로 들어감.


9시 30분.

책읽(어주)기. 다 읽고 불 끄고 같이 누워서 재우기.


10시.

취침. 이 아니라 취침시키고 나도 그대로 취침할 뻔하다가 나옴.


10시 30분.

유튜브 제작. 도저히 시간이 부족하다. 오늘도 LG가 야구를 이겨서 인터뷰와 하이라이트 보면서 하니까 느림. 시청자 여러분 내일 아침에는 못 올리고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12시.

아내와 통화하며 서로의 각개전투 일상 공유.


1시.

브런치 일기 쓰기. 오늘 일과 미리 중간에 안 써놨으면 못 쓸 뻔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있었던 긴 하루였다. 정말 다시 되돌아보면서도 많은 걸 했고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이건 다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바쁨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닐 때 전에 어떤 상사가 정말 바쁜 날에는 종종 '이러니까 살아있음이 느껴지지 않냐'라고 하곤 했다. 개뿔. 회사 일을 바쁘게 해 봐야 그건 다 누군가(다른 회사건, 고객이건 소비자건 누구든)를 위해 하는 건데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를 위해 쉴 틈 없이 바빴던 하루. 살아있음을 느끼며 이제 잠을 자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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