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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14. 2022

기억을 걷는 시간

우리들의 해방 일지: 남편 20일째

7월 13일 수요일 비


밤새 비가 많이 왔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오늘 아침은 그래도 좀 수월하게 등원을 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어제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고 아침 등원을 도와주고 가셨기 때문이다. 물론 나 혼자서도 아이를 데리고 있거나 등 하원을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손이 2개 더 있으면 정말 편해진다. 아이는 할머니가 집에 같이 있으니 더 말도 잘 듣고 엄마 찾는 투정도 덜 부리는 것 같았다.


등원 이후 어머니도 댁으로 가시고 다시 나 혼자 집에 남았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 딱히 밖에 나갈 일도 없었고 오늘은 본격적으로 둘째를 집에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며칠 전 아내가 보내준 준비 리스트를 자세히 다시 살펴보았다. 아기가 집에 오는 것은 다음 주 수요일이니까 실은 아직 급하진 않다. 청소나 물건 배치 같은 것들은 이번 주말부터 화요일 사이에 하는 것이 더 시의적절할 것 같았다. 대신 미리 할 수 있는 것들을 오늘 해결하기로 했다.


먼저 쇼핑이다. 사실 육아용품은 집에 이미 거의 다 마련되어 있다. 작년에 둘째를 낳은 아내 친구가 출산 이후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첫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좁은 집에 살았었고 아기침대나 영유아 놀이용 기구(보행기 같은 것들)는 대여로 해결했었다. 지금 사는 집은 훨씬 넓기 때문에 차로 2번이나 실어 날라서 물건을 다 받아왔고 창고와 베란다와 서재 곳곳에 나눠서 적재해두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5살 아이가 누울 수 있을 만큼 큰 아기침대도 있다. 이런 큰 물품들 외에 가제수건이라든가 육아용품은 첫째 때 썼던 것을 그대로 다시 쓰면 된다. 그렇다 보니 쇼핑이라고 해봐야 새로 살 것은 기저귀나 분유 등 몇 가지 소모품밖에 없었다. 금방 해결!


다음은 세탁이다. 아가들은 피부가 예민해서 새 옷도 그냥 입으면 안 되고 한번 빨아서 입혀야 한다. 옷들은 저번에 한번 빨래를 한번 잔뜩 해놨다. 오늘은 침구류나 창고에 있던 인형 같은 것들을 전부 꺼냈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창고에서 지금 필요한 물건인지를 의논하고 낡은 것들은 버릴지 말지를 결정했다. 물건들을 보자 동영상으로만 남겨두고 희미해졌던 기억들도 되살아났다.


"오! 이건 내가 첫째 때 정말 잘 썼던 물건인데!"

"와 이거는 첫째가 정말 좋아하던 건데~ㅋㅋ"

 

이어서 선별 시간을 가졌다. 찬장에 골동품처럼 모셔둔 젖병이나 아기욕조 같은 것들을 꺼내서 신생아 때 필요한 것만 빼놓고 다시 정리해두었다. 분명 첫째 때는 그때그때 닥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사기에 급급했는데, 지금은 집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첫째와 비교하면 둘째는 마치 풀옵션이 완비된 호텔에 들어오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사용법도 다 잊어버렸던 물건들이 막상 만져보니 무슨 사이코메트리 초능력자처럼 내가 예전에 했던 것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이렇게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해결하다 보니 금세 청소 빼고는 다 지울 수 있었다. 침대에 디데이 달력까지 세워두고 나니 정말 이제 곧 둘째가 이 집에서 함께 살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실은 저 디데이 달력은 매일 넘기는 것 자체가 일이라 주변에서 '며칠이나 가나 보자'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래도 한 100일까지는 넘겨줬던 것 같은데 글쎄 이번엔 어떨지.


첫째 하원 후에 태권도 도장에 체험수업을 했던 일이나, 저녁식사 후에 아이가 혼자 1시간 반 동안 초등학교 입학 준비 수학책을 70페이지나 풀었던 이야기도 자세히 하려면 쓸 말이 많지만 일기 쓰다 또 새벽에 잘 순 없으니 그냥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만 해두고 넘어가야겠다.


낮에는 둘째를 위해 밤에는 첫째를 위해 바빴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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