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축가를 듣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 이후 이어진 몇 초간의 정적.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건만,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윽고 이어지는 음악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같이 일주일간 연습을 도와준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타 줄을 튕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나는 박자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노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고음인 곡이었지만 어찌어찌 큰 실수 없이 끝까지 완창 했다. 1절과 2절 사이의 간주 부분에선 준비한 세리머니(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양가 부모님께 드릴 말씀을 준비해 와서 황급히 읽은 것에 불과하다)도 완료했으며, 노래 후에는 웨딩플래너의 조언에 따라 신부에게 다가가 한번 안아주는 미션까지 해냈다.
노래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남들이 어떻게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차례가 끝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안도감이 몰려오며 그제야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꽉 찬 하객석 중간중간엔 결혼식 시작 전에는 보이지 않던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꽃 장식을 포함하여 식장 군데군데 우리의 계약서를 충실히 반영한 인테리어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꽤나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노래를 마친 후 몇 초 동안은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는 주례 선생님과 사회자의 지시를 미소 띤 얼굴로 수행할만한 느긋함도 생겼다. 무대를 내려가 혼주석에 앉아계신 양가 부모님께 절을 하고 힘껏 안아드릴 때까진 모든 게 좋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펑펑 울기 전까진 말이다. 어쨌든 나도 부모의 품을 떠난다는 면에서 뭉클한 감정이 든 건 사실이나, 남의눈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개념 때문인지 신부 부모님이 눈물을 보이는 건 익숙한 풍경이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정말 드문데... 평소에도 감성적인 성격의 어머니라 이해는 하지만, 하객들에게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걱정이 앞섰다.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아무튼 위기(?)를 넘기고 나서 신랑 신부 퇴장으로 결혼식 1부가 종료되었다. 친구들이 뿌려주는 꽃가루를 온몸으로 맞으며 퇴장했지만, 민망하게도 곧바로 기념촬영을 위해 또 단상 앞으로 올라와야 했다. 가족 친지들과 한 번, 친구들과 한 번, 겨우 두 컷일 뿐인데 왜 이리 촬영 기사는 요구사항이 많은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부케를 던지는 동안 우리 뒤에 서있는 지인들도 점점 지쳐가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서빙되기 시작한 식사를 자리에 놓고 온걸 보니 내가 더 애가 타는 것 같았다.
촬영 후 하객들이 한가로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신랑과 신부는 황급히 결혼식 2부를 위한 의상으로 갈아입기 바빴다. 나야 보타이(나비넥타이)를 일반 넥타이만 바꾸는 정도로 끝났지만, 여자친구는 ‘드레스 투어’에서 고른 다른 드레스를 입어야 하므로 시간이 모자랐다(신랑이 턱시도에서 일반 양복으로 갈아입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턱시도를 입기 싫어서 넥타이만 교체했다).
1부에 비해 2부는 간소했다. 신랑 신부가 케이크에 촛불을 붙인 후 커팅을 하고, 샴페인 잔을 들어 건배 제의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나는 너무 목이 마른 나머지 잔에 있는 술을 원샷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식사 중인 하객들 사이로 인사를 다녔다. 양가 혼주와 신랑 신부로 구성된 총 6인의 사절단(?)이 이동하기에 테이블 사이 간격은 턱없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일렬로 죽 늘어서서 다니는 불편한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식전 하객맞이 때에 비해 한 명, 한 명에게 그나마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나 슬슬 식사를 다 한 손님들이 퇴장하고 있었으므로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해야 했다.
마지막 테이블을 돌고 나서도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폐백이 남았기 때문이다. 원래 폐백이란 결혼식 후 신부가 시부모를 비롯한 여러 시댁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식을 말하지만, 요즘은 결혼식장 내에 폐백실을 별도로 설치하여 본식(本式) 직후 별도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매체를 통해 흔히 접하던, 볼에 연지곤지를 찍어 바른 신부가 신랑과 함께 앙증맞은 한복을 입고 온갖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 앉아있는 장면이 폐백 의식이란 것도 결혼준비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과거의 선택에 다시 한번 후회했다. 나도 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여자친구의 모습에 과연 폐백을 꼭 해야만 했나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최근엔 간소화 경향으로 폐백을 생략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도 하고, 실제로 내 주변에도 안 한 커플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폐백을 진행한 이유는 결혼 준비 내내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마법의 단어, ‘그래도 남들 하는 건 다 해야지’였다. 특히 우리 집에서, 어떻게 보면 신랑 측이 대접받는 자리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전통’이니, ‘이것도 이미 한 차례 간소화된 문화’니 하며 당연히 폐백은 해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뭐, 이왕 준비했으니 하면 하는 건데... 폐백에 쓰이는 ‘이바지 음식’을 신부 측에서 준비하는 전통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폐백 자리 자체가 나에겐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애초에 양가에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갈 때도, 예단교환이나 함이 들어가는 과정에서도 각 집안의 부모님과 형제만 조우했던 우리였다. 그런데 새삼 결혼했다고 온 친척들을 불러 모아 인사드리는 것이 조금 유난스럽다고 해야 할까. 특히 온 얼굴에 드러나는 여자친구의 감정이 나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와중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절을 올리고, 대추를 던지거니 받거니 하는 '쇼'(물론 전통이나 종교적 뜻이 있다곤 하지만)를 하는 게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결혼식을 며칠 남기고 여자친구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오빠, 요새는 폐백 할 때 신랑 쪽뿐만 아니라 신부 쪽 친지들도 모아놓고 한 번에 인사드리기도 한대. 어차피 양쪽 다 생략했던 인사, 몰아서 같이 한다는 의미인거지. 우리도 그러면 안 될까?”
답은 ‘응, 안돼’였다. 우리 집에 가서 말하자마자 폐백의 본래 의미와 전통을 들먹이며 단박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폐백실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이것저것 절차를 진행했지만, 이미 너무 지친 나머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시키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전통'에 따라 친지분들이 넉넉히 쥐어준 용돈이 신혼여행에 금전적으로 큰 보탬이 될 거란 점이었다.
축복을 받으며 퇴장하는 신랑과 신부. 1부 결혼식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난 기분이지만, 아직도 뒤에는 순서가 한참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