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근거지'라는 말이 한창 이슈였다. 교외 체험학습이란 명분하에 가족 여행 등으로 공식적으로 학교 수업을 빠질 수 있게 된 요즘, 여행 한 번 안 가고 개근상을 받는 아이는 그만큼 가정에 여유가 없다는 의미라 한다(참고로 교외 체험학습은 출석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개근상을 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개근상을 받아도 개근거지가 아닌 것이다).
남에게 과시하길 좋아하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전염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아이는 저런 말도 안 되는 비방에 신경 쓰지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키우리라 다짐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을 직면했을 때 상처받지 않을지 걱정이 되긴 했다. 슬슬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도 같은 반 아이들이 일본에 다녀왔다느니, 워터파크에서 놀다 왔느니 자랑하기 시작했으니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맞벌이로 강남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정말 '개근거지'는 존재하냐고. 결혼을 일찍 한 덕에 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인 녀석은, 여러 의미로 내 멘토가 되는 고마운 육아선배이기에 솔직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질문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학기 중에 가긴 어딜 가. 공부해야지. 학교도 학굔데 여행 다녀온다고 학원 1,2주 빠지면 나중에 귀찮아져, 진도 뒤쳐져서. 여행은 애 방학 때 가야지, 좀 비싸고 붐벼도."
아 그렇구나. 다 같이 못 가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불안함이 명쾌하게 해결되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강남스러운' 결론에 헛웃음이 났다.
비교적 최근엔 아이들이 친구가 사는 집 등기부등본을 떼 보고 자가가 아닌 전세일 경우 놀림거리로 삼는다는 기사를 언론에서 자극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구체적인 지역 언급 없이 강남의 한 초등학교라고만 밝혀 그 동네 분위기를 검증할 방법은 없다. 다만, 지금 사는 동네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것 같냐고 나에게 물어본다면 단연코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강남 사람들이 특별히 인성이 훌륭해서도, 교육을 잘 시켜서도 아니다. 이 동네는 꼭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월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졸업 때까지만 잠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재건축을 앞둔 단지를 보유하고 있어 해당 집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신축에 살고자 일시적으로 이사와 있는 사람들, 그 외 각종 세금문제나 사업 같은 이유 때문에 세를 얻은 사람들 등등...
단순히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전셋집이라고 무시를 한다는 건, 동네 분위기를 잘 모르는 부모 몇몇이 아이들에게 고정관념을 잘못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오래 거주한 이들은 자가와 임대로 부(富)를 논하는 것이 그날 하루의 옷차림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행동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개근(皆勤)과 휴가 이야기로 돌아가, 우리 집도 처음으로 아이의 여름방학을 맞았다. 보내던 어린이집은 방학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이 '첫 방학'인 셈이었다. 극성수기로 분류되는 기간인 아이의 방학일정에 따라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때 여행을 계획했다(물론 방학은 방학대로 같이 보내고 개학 중에 여행을 갈 수도 있으나, 그러기엔 맞벌이 부부의 연차휴가가 부족했다).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때면 날씨와 더불어 어김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서로의 휴가 계획이기에, 동네의 다른 학부모들과 마주칠 때마다 본의 아니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작년 휴가철에 우리가 여행 가려는 지역의 어느 숙소에서 묵고,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를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다. 이를 참고하여 알아본 결과... 비용이 말이 안 됐다. 비수기 때나 큰맘 먹고 갈 수 있던 그 숙소들은 극성수기를 맞아 2,3배가 우습게 가격을 올렸고, 도저히 우리 예산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결국 '가성비' 숙소를 예약하며, 나와 아내는 울적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개근거지가 아니라 우리처럼 휴가 때 돈 쓰면서도 우울해지는 '휴가거지'가 더 맞는 말이 아닐지.
상처 준 사람 없이 상처받은 사람만 있는 이 씀씀이 문제는 이후로도 잊을만할 때쯤 우리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