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조심, 집단의 힘
강남으로 이사한 뒤 여러 번 들은 질문이 있다. '타 지역대비 민도가 높냐'는 것. 정말 궁금해서가 대부분이겠지만, 간혹 같은 표현이 비난처럼 들릴 때도 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렇게 강남, 강남 하더니 막상 가서 살아보니 어때? 거기 사람들은 인성도 뛰어나고 뭔가 좀 다르나?" 쯤으로 해석된달까. '민도'라 함은 사전적 정의로는 국민의 생활, 문화, 의식 수준을 말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에티켓'이나 '예의'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나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와 '그렇다'의 중간 정도쯤이다. 이웃들 간의 소통이 거의 없다시피 생활하는 현대사회에서 상대의 수준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장시간 동안 진솔하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모를까. 그리고 강남이라고 '빌런'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놀이터에 일회용 커피잔을 내려놓은 채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 아파트 단지 내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자전거, 거, 자연스럽게 두 칸의 주차공간을 차지한 승용차 등등. 어디 가나 상식 밖의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이웃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간 건 사실이다.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귀엽다며 웃어주는 어르신들이 많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같은 동 사람들은 거의 빠짐없이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한다. 그렇다고 이 동네 사람들이 특별히 남들보다 인성이 바르다거나,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혼자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 보이면서도 부러울 따름이다.
한편으론 이런 모습이 개인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이미 그 동네나 아파트 단지에 정착된 문화 때문일 확률도 높다고 생각한다. 나만해도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단지 내에서 남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성향은 아니었지 않은가. 말을 걸어주는 이웃들과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그들과 같이 행동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이와 자주 가는 놀이터에서도 마찬가지다. 간혹 어린아이들끼리 작은 충돌이라도 일어날라치면 부모들이 서로 죄송합니다, 먼저 가세요, (상대방 아이를 보며) 괜찮니?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자식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상대방 아이가 더 걱정되는 부모도 거의 없을 것이다. 잘잘못 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사과하는 편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아파트 단지 분위기 자체가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 있으니 오히려 그 분위기에 거스르기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민도' 문제는 말하기 상당히 부담되는 주제다. 부동산, 교육 같은 이야기는 시장 가격이나 학군같은 객관적인 자료와 현상이 있으니 설명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문제는 판단할 표본도 충분치 않고, 상대에 대한 평가도 주관이 크게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가하기 조심스럽다. 우연히 내가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이 동네를 대표하게 되는 '샘플 추출'의 문제도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고.
그럼에도 자신이 느끼는 동네 분위기가 거주지 선택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수준을 따지기 보다, 나와 맞냐 안 맞냐에 따라 거주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강남 이사를 위해 동분서주 임장을 다니는 와중에도 아내는 집의 구조, 시설, 입지 외에도 길을 오가는 주민들의 표정과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듣곤 했다. 그 '분위기가'가 이곳으로 이사오는데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그녀만이 정확히 알겠지만. 어쨌든 나도 최대한 보이지 않는 규율을 따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이 동네 전체를 판단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