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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처음부터 입으라고 만든 옷이 아니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얼마 전에 큰 아이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이모, 사랑이는 왜 화를 안내요? 원이가 사랑이한테 더 미안해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어딨어요?"


<킹더랜드>를 본 중딩의 분노에 나는 굳이 설명을 해주었다.


" 사랑이가 더 화를 내고 원이가 더 미안해했으면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지금처럼 열심히 보지 않을 거야.

우리 사는 거랑 너무 닮아서 스트레스받거든"


나라면~ 절대 안 그럴 거 같다고 화를 내는 것부터

아이는 이미 이 스토리의 주인공과 완전히 일체 되어 있다.

그런 아이가 생각하기에는 주인공의 행보가 설득이 덜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서 진정으로 '나라면' 할법한 행보를 묘사해 주는 것은

이 드라마라는 상품에 애초부터 탑재되어 있지 않다.


이 상품은 하루종일 일상에 지친 시청자들이 달콤한 야식과 함께 심리적 스트레스 없이 즐기기 위해 태어났다. 지친 시청자들은 낮에 자신이 보낸 시간처럼 리얼하게 감정을 토로하고 충돌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이런 상품에게 바라는 것은
나와 주인공을 완벽히 일치시키고 싶어 할 만큼 팬시한 비주얼이다.

동시에 나의 삶과는 정반대로 술술 풀려야 하고, 쉬워야 하고, 안전방지턱 정도의 타격 정도를 원한다.

이런 상품에서 '리얼'은 함량 0%다.



앞서 이모는 피상적인 것을 경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는 피상을 위해, 피상에 의해 만들어진 피상의 상품이다.

애초부터 입으라고 만든 옷이 아닌 것과 같다.


피상적 묘사는 현실을 닮아있다.

이런 드라마는 소비자들에게 세상에 절대 일어날 일 없다는 걸 알지만 일어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재벌 2세가 말단 호텔리어와 사랑에 빠질 리 없다.

본부장과 말단직원들이 어울려 친구가 되지 않는다.


이 스토리를 현실의 기대어 재단할라치면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과 열등감에 가득 찬 재벌 2세는

조실부모한 말단직원보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가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상대에게서 사랑을 느낄 가능성이 더 높다.

아직도 회사내부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본부장은

진정 회사를 얻고 지키고 싶다면

말단직원들보다 임원들과 더 깊은 네트워크를 갖기를 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품은 현실에 관심이 없다.

아니, 반대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정반대로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품은 생필품이 아니라 팬시점 완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토리는 가짜라고 불리지 않는다.

다 알면서 속아주자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말이다.

이 스토리가 가짜라고 불리지 않는 것은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에 진짜이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해 알고 싶고

돈보다는 직원을 지키고 싶고

어떠한 어려움도 막을 수 없는 온전한 사랑을 꿈꾸는 주인공의 욕망은 진짜다.


잠깐! 주인공의 욕망은 나빠야 한다며! 후져야 한다고 했잖아! 싶다면...(고맙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읽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0)


이런 상품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피상적인 묘사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피상은 사실 리얼은 아니다. 그런데 욕망이 나쁘고 후져지면 그런 피상들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상품의 탄생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욕망은 선하고 이상적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구'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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