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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대하는 너와 나의 자세

<마감 일기> 김민철 작가의 그 문장

“마감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나의 마감이 늦어지면 다음 사람이 마감을 맞추느라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아는 것.
중요한 지점은 '지금까지의 최선의 공이다'."
-<마감 일기>-


#시험날 마침 치기

딩. 동. 댕. 동~~ 딩동~ 댕~~ 동!

시험이 끝나는 종소리. 나는 늘 종소리가 날 때까지 시험지를 붙들고 있는 아이였다. 문제를 일찍 풀고 엎드려 자거나 아예 밖으로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뭔 미련이 그리 많은지 끝까지 시험지를 들여다보곤 했다.

점수 1점, 등수 하나에 벌벌 떨던 학창 시절. 시험지를 붙든다고 점수가 오르는 건 아니건만, 그건 나만의 미련이고 버티기 작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방송국의 잔인한 마감 시계

학생 때 습관인지 방송작가 세계에 와서도 원고를 끝까지 붙들었다. 완성 파일을 받으면 섹션을 나누고 그 옆에 끝낼 시간을 적어 두고 여기는 10분, 저기까지 30분, 섹션이 끝날 때마다 밑줄을 좍좍 그으며 초조하게 마감 시간을 맞춰갔다. 마감이 다가오면 팔딱팔딱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느낌!

마음은 올림픽 단거리 선수인데 글쓰기는 경보 수준. 할 말이 많으면 그림이 짧고, 쓸 말이 없는 곳은 그림이 하염없이 길 때의 야속함이란! 시간에 맞춰 쓰는 방송 글은 늘 고역이다.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진리는 방송국의 잔인한 마감 시계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



# 그, 놈의 마감 때문에

그놈의 방송국 마감 시계 때문에 할 말이 많다. 가장 기억나는 건 휴먼다큐 프로그램을 할 때, 추석 다음 주 방송에 걸린 나. 촬영이 늦어져 테이프를 보고 편집 콘티 짜기에도 빡빡한 시간이라 명절 내내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마감을 맞출 수 없는 일정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일 때문에 명절에 못 간다고 선포! 불편한 마음으로 가족들만 보내고 연휴 내내 시간을 갈아 넣어 편집 콘티를 짜서 피디에게 넘겼다.

그랬건만.... 내 명절을 다 바쳤건만...... 그놈의 피디는 연휴를 끝까지 다 쉬고 나와 늦게 일을 시작해 나를 불안하게 하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편집할 시간이 부족해 결국 내가 원고 쓸 날 하루를 날렸다. 50분 원고를 발로 써도 그 시간 안에 못 쓴다고, 더빙 시간을 조금만 미루자고 했더니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알겠다고 하더니만 반나절 만에 돌변! 부장님이 절대 안 된다고 했다며 원래 시간 안에 써달란다.


“이런 미친 x”하고 싶었지만 욕할 힘도 없었다. 그보다는 멈추지 않는 잔인한 방송국 마감 시계에 맞춰 괴발개발 시간을 채워 쓰는 일이 더 급했으니까. 그렇게 더빙이 끝났지만 너무 화도 나고 속상했다. 핑계일 수 있지만 내 명절을 갈아 넣고 가장 공들였던 편을 망쳐 놓다니! 마감이 닥칠 때까지 전혀 얘기도 없다가 막판에 몰려 마감은 지켜야 한다는 그 태도에 마음이 확 닫혔다.(누군가는 귀가 간지러울 듯) 화내기도 아깝고 꼴도 보기 싫어서 프로그램을 관둘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한 나의 흑역사. 차라리 싸웠더라면 나았을 텐데. 내겐 잊을 수 없는 마감의 악몽 ‘저주 편’이다.


마감은 타인과 연결된 감각이다


이런저런 마감의 악몽 때문에 다른 마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던 차에 알게 된 <마감 일기>. 모두 내 이야기 같은 단짠단짠 한 여러 작가의 마감 고군분투기가 담겨있다. 누군가는 마감 때문에 글쓰기가 완성된다며 마감이 글쓰기의 원동력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내가 주는 때가 마감이지’라고 허세를 부리고 싶다 하고, 누군가는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말한다. 그중 가장 내 마음에 든 것은 ‘마감은 타인과 연결된 감각이다. 타인을 믿고 최선의 공을 던지는 것’이라는 김민철 작가의 문장이다.

그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춰 생각했다. 혹시 내가 원고를 끝까지 붙잡고 욕심내는 바람에 누군가의 시간을 갈아 넣도록 한 적이 없는지. 반성한다. 빌려준 돈은 기억하면서 정작 자기가 빌려 간 돈을 기억 못 할 수도 있으니까.



# 마감은 너와 나의 세계

위기 때 사람을 잘 알 수 있듯이, 작가들은 마감을 맞을 때,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마감은 오롯이 나만 잘 쓰면 되는, 나만의 시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특히, 여러 사람과 일을 해야 하는 방송국의 글로소득자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감은 '나의 자세'로만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마감은 '너와 나의 세계'라는 것. 내가 누군가를 믿고 최선의 공을 던지는 일이라는 것. 대작을 쓰는 것도 아니니 내 마감의 목표는 나 때문에 타인이 시간을 갈아 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나의 마감의 마감의 마감의 마감의 마지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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