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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mato Apr 23. 2019

눈이 부시게

안녕, 아빠


아빠가 떠난 후로 의미 있는 것들을 좋아해요. 시간은 한정적인데 그 소중함을 잠시 잊고 살 때가 있거든요. 아시다시피, 사람 일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소모적인 삶이 아닌, 생산적으로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다 운명을 맞이하고 싶어요. 그게 아빠가 저에게 주신 제일 큰 선물이 아닐까요. 그 후로 더욱더 제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어요. 가사가 매력적인 윤종신의 노래, 교훈이 있고 귀와 눈이 즐거운 디즈니 영화, 여운을 향유할 수 있는 에세이... 감동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요.      


얼마 전 제게 강한 메시지를 준 드라마가 있어요. JTBC에서 최근 종영한 월화 드라마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예요. 주어진 시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70세 노인(김혜자 역 김혜자)이 되어버린 25세의 억울한 여자(김혜자 역 한지민)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내던져 버리고 늙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26세 남자(이준하 역 남주혁)가 그려내는 ‘시간’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예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가 나오길래 ‘순 판타지 드라마겠거니..’ 하며 본방송 시간에 우연히 첫 회를 접하게 되었어요.      


“이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
우리가 뭔가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매 회 눈물을 쏟으며 본 것 같아요. 초반에 혜자가 사고를 당한 아빠를 되살리기 위해 시계를 돌리고 또 돌리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에서 많이 울었어요. 결국 아빠를 구해서 너무 기뻤는데, 극 중의 혜자는 순식간에 70대 노인으로 살아가게 되죠. 정신은 25세인데 말이에요. 언제 본래 꽃다운 혜자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궁금증을 안고 10화를 지켜보았는데,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김혜자 할머니만의 이야기였어요. 수백 번 시계를 돌려 구한 건 아빠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었고요. 드라마의 충격적인 반전이 있고 나서, 혜자의 애틋한 인생사가 나와요.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혼자 미용실 일을 하며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홀로 키웠죠. 그 당시 남편이랑 짧았던 결혼생활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거예요. 그래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김혜자는 자신에게 가장 눈이 부시게 소중했던, 온통 그리운 기억이 가득한 25살의 그녀로 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오로라는 에러야. 원래 지구 밖에 있는 자기장인데, 어쩌다 보니 북극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거야,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거야.  그래, 에러도 아름다울 수가 있어.”

극 중 준하와 혜자는 저와 같은 취준생이에요. 화려해야만, 성공해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혜자는 준하의 청춘을 위로해주는 동시에 저까지 위로해줬어요. 전 완벽하지 않은 존재일지라도 저 스스로에게, 우리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아름답잖아요. 항상 절 희망이라 불러주셨죠. 이 대사가 왜 이렇게 와 닿고 애틋했는지요. 제 인생을 애틋하게 여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본 옵션으로 주어지는 것이 젊음이라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너희들이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날 보면 알잖아.”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

우리는 늘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죠. 아빠가 떠나기 전에는 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지금도, 어리석게도 전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철없는 딸이네요. 점점 왜 미운 딸이 되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욕망에 사로잡혀, 제가 가진 행복을 놓치고 살고 있었어요. 며칠 전 해외취업 준비로 스트레스를 받는 저에게 엄마가 “건강만 해라. 이렇게 살아 있잖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갑작스럽게 늙어버린 혜자에게, 하루아침 제 곁을 떠난 아빠에게, 어쩌면 그냥 얻어지는 저의 젊음이 누군가에겐 그리움이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무너진 자존감에 신경질 내는 저의 행동이 바로 의미 없이 객쩍게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삶은 고(苦)가 아니라는 것도요.


“당신은 어찌 해가 바뀌어도 나이를 안 먹니? 곱다 고와. 거기는 어때요? 꿈결에도 안 나오는 거 보면 좋긴 한가 보네. 당신이 좋아하던 시계, 가져오려다 그만뒀어요. 서운해요? 미안해요! 시계 못 가져와서. 그리고 평생 외로웠던 사람 혼자 가게 해서.”

이 대사는 엄마가 저랑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가장 오열했던 장면일 거예요. 아빠도 가끔 꿈에 나타나 줘요. 보고 싶어요. 제 꿈보다는 엄마 꿈에 많이 나타나 주세요. 괜찮다고 그만 미안해하라고 위로해주세요.


“어머님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음..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가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때가.”
“어머님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어머님은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간 속에 살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    

아빠는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저도 훗날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누가 묻는다면 저런 평범한 날일까요? 아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요즘 알츠하이머로 많이 힘들어하세요. 전화를 드리면 제가 중학생이 되었다가, 교수가 되었다 해요. 얼마 전에는 할아버지가 집을 잃으셔서 대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어요. 두 분 모두 착한 치매가 오셨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요. 항상 따뜻하셨던 두 분이 더 해맑아지셨어요.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찡하고 눈물이 날까요.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두 분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 속에도 아빠가 계셔야 할 텐데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지시고 계세요. 기억이 왜곡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아빠, 도와주세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고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제 인생의 가치는 아빠가 알려주셨어요. 아무 목적 없이 살았던 저를 바로잡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려주셨어요.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게 있잖아요. 그 소중함을 일찍 깨우친 만큼 제한된 시간을 아빠 몫까지 열심히 살아볼게요. 매일매일 눈이 부시게. 그렇게 하루를 살다가 아빠를 만나러 갈게요.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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