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헉! 하고 멎을 것 같은 강렬함과 그 위에 얹힌 사연에 능소화의 여름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떨린다.
조그맣고 아리따운 궁녀 소화. 하룻밤 성은 입어 빈이 되어 처소도 생겼건만 12년 동안 찾아오지 않는 임금을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했던 소화. 처소 담벼락에 기대어 가슴 떨며 기다린 임금은 오지 않았지. 스러져 목숨이 떠날 때까지 기다림으로 채워진 나날들. 죽어서도 보고 싶어 담 밑에 묻어 달라던 소화의 간절함이 피어올라꽃으로 환생한 능소화는 그 임금이 이제나 저제나 어디쯤 오려나 목을 길게 늘이고 내다보는 소화의 예쁜 얼굴 같다.
막내딸과 함께 송리단 길을 걷다 능소화를 만났다.
능소화 전설을 말하는데 딸은 능소화를 부른 가수 안예은의 노래를 듣다 가슴 저려 눈물이 났다고 한다.
딸을 만나면 꼭 한두 가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좋다. 이미 라테의 엄마는 옛날 노래밖에 모르는데 요즘 젊은 이들이 듣는 노래 중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면서 들어 본다. 날 것 같은 목소리로 처절하고도 아련하다가 원망의 소리가 가득한 노래다.
워낙 길을 잘 아는 내게 딸들이 붙여준 안내비게이션이 순간 딴생각으로 딸의 짓궂게 놀리는 재미에 서로웃음보가터졌다.
상점 앞의 예쁜 꽃
한가로이 대화 나눌 상대가 없다가 막내딸과 얘기를 나누니 이래도 즐겁고 저래도 즐겁다.
역시 딸은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 두뇌 회전이 빠름을 느낀다. 역시 MZ세대라 하면 딸은 자기는 MZ세댄 아니고 낀세대에 속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겐 여전히 상큼 발랄한 MZ로 보인다.
집에 들어와 딸은 차 한잔 가볍게 마시고 컴퓨터 안 되는 것은 없냐고 묻는다. 딸 가고 난 다음에 앗!, 하지 말고 생각해 내라는 딸. 난 또 웃음이 입가에 고인다. 바쁜 중에도 엄마 휴무라고 찾아와 함께 밥도 먹어주고 웃음까지 듬뿍 안겨 주는 딸이 마냥 예쁘고 고맙다.
다음 달엔 독일에 일주일 출장 간다고 하면서 귀한 봉투를 선사하며 추석 지나고 오겠다고 한다. '괜찮아 추석에도 일할 거야. 바쁜데 오지 않아도 된다'면서 보낸다.
딸을 보내고 잠시 쉰다. 8월 내내 더위에 지쳤는지 피곤함에 살포시 잠이 들었다가 탄천으로 나간다.
제법 선들한 바람이 불어 오랜만에 땀방울이 목을 타고 내려오지 않아 산책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여름은 모든 것을 무성하게 키워 놓는다. 풀도 나무도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모든 땅을 덮어 버릴 듯이 푸른 덩굴들의 기세가 당당하다. 마지막인 듯 바람을 담아 목이 터져라 울어 젖히는 매미들의 합창과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살인적인 더위로 지쳤던 여름이 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어느새 해가 서쪽 하늘에 숨었다. 번화한 도시 한편에 이토록 그윽하게 노을 지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가슴이 뛴다. 재작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인의 말만 듣고 이사를 왔다. 살면서 발견한 이 탄천 길을 산책하면서 바라본 노을로 시가 한 편 나오고 브런치 작가이신 최용훈 교수님께서 영역도 해주셔서 탄천의 노을은 내게 사랑이기도 하다.
가장 복잡한 도시에서 숨 막히듯 사는 세월, 몸을 움직여 잠깐 나오면 제대로 크게 호흡을 하게 된다. 헛둘헛둘 팔운동도 해가며 걸어도 어느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도 없이 자유로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멀리 물새 소리도 드물게 들려오고 부지런한 누군가의 손길로 가꾸어진 천일홍, 분꽃, 백일홍이 보여 반갑기도 하다. 시간이 허락하면 잠깐이라도 사계절을 톡톡히 느껴보는 자연의 너른 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이상 기온에 푹푹 찌는 더위로 자주 나와 보지 못한 탄천길. 이제 가을이면 낮에도 나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주 보던 고라니도 보고 물에서 유영하는 오리와 철새들. 왜가리, 귀족처럼 보이는 백로 부인들도 보고 싶다. 너무 뜨거워 삶아질 것같던 이 여름을 잘 지냈는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