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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Oct 16. 2024

다치고 나서야 깨닫는 것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로 했다.

놀았다는 표현은 글도 쓰지 않고 주로 넷플에서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이것저것 본다는 것이다.

티브이를 보면 바보상자 앞에 앉아 있다고 하던 사람이 생각났는데 정말 난 바보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도 하고 산책을 하고 소설 듣기를 하면서 날들을 보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쌓여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살고 있으면서 무엇을 이루려고 그토록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위) 멧비둘기, 아래) 왜가리

그런데도 가끔은 조바심에 행동은 빨라지고 여기저기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든 팔과 다리를 보며 부끄럽기도 하다. 내 몸에 정말 많이 미안하다. 이젠 쉴 만큼 쉬었으니 마음을 가다듬고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순간에 예기치 않게 사고가 났다. 약국 앞에서 만나 사고 얘기를 듣던 동료는 화장실에서 넘어지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다행이라는 말을 들으며 아찔했던 사고 순간이 떠오른다.

안 그래도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순간 떠오른 것은 119에 전화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타일 바닥에 앉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서 뼈를 다쳤는지 가늠을 해보았다. 10여 년 전에도 낮은 의자를 딛고 찬장 위에 있는 것을 내리다가 넘어지고, 겨울에 살얼음이 덮인 길에서 미끄러지기 다반사였고 눈 쌓인 길에서 퍽퍽 넘어졌다. 한의원의 단골환자로 오랫동안 치료를 하기도 했다. 꼬리뼈는 깁스를 할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조금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한다.

맥문동 열매가 마치 블랙마노, 그린마노 원석처럼 보인다.

오래전 시부모님의 식사 시간을 맞춰야 해서 20여 년 넘게 동동 걸음을 치며 살았어서 내 걸음은 언제나 빠르다. 무엇이든 빨리 해내야 시부모님의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에 느리던 나는 어느새 발걸음부터 빨라져서 아이들과 함께 시장을 다녀오거나 외출을 하게 되면 '엄마! 천천히 좀 걸어요.' 하며 따라갈 수가 없다며 불만을  표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몸에 배였는지 여전히 빠르게 걷는다. 동료들은 키도 작은 사람이 무슨 걸음이 그처럼 빠르냐며 놀란다.

마음을 고쳐 먹고 천천히 걷자며 주의를 기울여야 뚜벅뚜벅 천천히 걷게 된다.

 다행히 뼈에 이상은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그나마 안심을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한글날이라 병원은 못 가고 약국에 가서 임시방편인 약을 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약국도 모두 문을 닫아 결국 회사 근처 지하철 역까지 가서야 소염진통제를 살 수 있었는데 그것밖에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다칠 때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쪽 엉덩이는 부어올랐고 꼬리뼈 쪽이 당기고 허리가 아파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빠르게 걷던 걸음부터 느리게 걸어야 통증이 덜했다. 신호등이 바뀐다고 뛸 수도 없다. 늘 하던 대로 몸이 재빨리 반응하면서 느끼는 통증으로 인해 이제야 서서히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매 순간순간의 급한 움직임에 따라 통증이 반되는 몸을 다시 쉬어 주기로 한다.

나이와 몸을 생각지 않고 행동했던 일들이 떠올라 이젠 조심해서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서 출근을 한다. 어느새 기온이 많이 내려가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무덥던 여름이 갈 줄 모른다고 푸념하던 시간들이 어느새 가을이 스며들어 있는 길을 걷는다.

한낮에 출근을 하기에 늘 덥다는 생각을 하며 여름은 언제 가려나 했는데 국화의 계절인 가을이 되었다. 길가 풍성한 감나무의 감들도 고운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스치듯 빨리 걸어 다니던 길을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으니 눈 안에 들어오는 것들이 더욱 많아서 좋다.

늘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독서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지. 놀고 있는 재봉틀로 뭔가 만들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만 한다.  이젠 잘 따라주지 않는 몸이면서도 하다못해 작은 액세서리라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온 황여울 작가님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빈 손으로 나서지 못하는 성격에 방수파우치와 팔찌. 핸드폰 스트랩을 만들어 선물했는데 팔찌가 이쁘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작가님도 내게 선물을 한 아름 주었는데  성수동 브런치 팝업 스토어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내가 시간이 안되어 방문이 어려울 것 같아서 이것저것 챙겨 왔다는 세심한 마음에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예약을 못했는데 너무나도 고맙다. 글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반듯한 작가님의 모습은 힘들게 지나온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긍정의 이미지 마법이라도 부려진 듯하다. 지난 주일에는 가까운 집사님과 피아노 반주자에게 고맙다며 핸드폰 스트랩을 선물했다. 귀엽게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물건을(순전히 개인적인 생각) 선물하는 것은 기분이 좋다. 선물 받는 지인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쁘다고 좋아하기에 덩달아 기쁘다.

아마도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하는지도 모른다. 늘 변함없이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작은 증표라도 하는 것이 삭막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 선물하는 것이 즐겁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좀 더 쉬어야 할까 보다. 마음먹은 일을 하지 않아도 뭐랄 사람이 없는데 아직도 생각한 것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까 봐 늘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을 이번 기회에 고치고 느리게 천천히 삶을 향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photo b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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