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풍경을 그리는 나무

by 안신영

매일 아침 걷는 산책길이 눈이 부신 이유는 두 팔 벌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겨울나무 사이로 벌써,

일렁이는 봄의 입김을 느낄 때

근육질의 남자가 자랑하듯 우람한 몸짓으로 턱을 높이 쳐들고 있는

메타스콰이어 나무를 거침없이 바라보며 어느새,

나는 가지마다 톡톡 초록잎을 틔워내는 모습을 그려 보는 것.

그 곁에서 쉼 없이 미래를 꿈꾸는듯한 얼굴로 한 마디, 두 마디,

혹은 한 뼘, 두 뼘, 새순을 하늘 높이 올려내는 스토로브 잣나무 새가지들

닿을 듯 말 듯 미풍에 흔들릴 때.


겨우내 삭풍에도 의연하게 마주 서서 뾰족한 꽃눈을 밀어내며 의기양양,

결국엔 벙긋벙긋 하얀 꽃망울 매달고 여봐란듯 목을 늘이는 목련 나무를 바라볼 때,

매일매일 산책길에 만나는 나무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오랜 친구처럼 여겨질 때.

어느덧 금싸라기 같은 촘촘한 햇살을 쏟아내며 앙증맞은 풀꽃과 온갖 꽃나무를 몸살 나게 하는

봄바람이 불어와 무수한 나비 떼의 군무를 보는 것처럼 꽃비가 쏟아져내리는 황홀경에 빠질 때면,

놀란 눈으로 숨을 잠시 멎고 바라보는 순간이 또한 가슴 벅찬 기쁨으로 살아 있어 감사하다고 느낄 때.


웅얼웅얼 혼잣말로 읊조리는 그 어떤 말도 모두 詩가 되는 계절의 먹먹한 울먹임까지도.

사르락 사르락 밤을 밝히며 대지를 적시며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안내하는 마지막 봄비에도

마음은 늘 새로움으로 열리는 것을...

자박자박 걸음을 떼다 봄맞이 까치꽃, 쇠별꽃, 냉이꽃, 누운주름잎 꽃등 지천으로 있는 것을 바라보다 기쁨에 구부려 앉아 손을 뻗어 만져 보려 할 때에

"가만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도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고 <풀꽃>을 노래한 시인을 떠올려 보며


저 앙증맞은 풀꽃처럼 나도 그렇게 기억해 줄 단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 이 길, 이 시간이

하루하루 눈에 담아내고 그리는 사소한 풍경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명임을 알 때.

멋쩍은 모과나무 슬며시 수줍은 새색시 볼 만큼이나 분홍빛 작은 꽃을 내미는 모습을 볼 때에.

배롱나무, 자귀나무, 대추나무는 요지부동 잎사귀도 틔우지 않아 성미 급한 사람 도끼 들고 찍어내려 한다지? 애를 태우며 기다리다 못해.


큰 키의 목련나무 곁, 질세라 쭉 뻗은 몸매의 계수나무 세 그루, 더 높이를 외치며 까치발이 되는 것은 달님에게 닿아 옥토끼라도 만나고픈 심정은 아닐까? 그 동그란 잎사귀 지나는 바람에 파르르 떤다.

초여름 한낮의 태양 아래 발갛게 달뜬 모습으로 한없이 빛나고 있는 홍가시나무처럼 이 마음도 애드벌룬처럼 부풀고 발개진 마음이 되고 싶어,

그대 앞에서는 저처럼 달아 오른 얼굴도 그리움으로 남고 싶은 순간일 때가 많아.

어느덧 녹음은 짙어지고 겨우내 묵묵히 있던 상록의 나무들도 하나둘씩 꽃을 피워내는 초여름의 나날,

쥐똥나무, 아왜나무, 피라칸사스, 남천나무까지도 무더기 무더기 흰꽃들을 풍성하게 피워내는 시절. 상록의 태산목, 주먹만 한 꽃송이(함박꽃)도 이 여름을 달구기에 충분하다고 느껴져 탐스런 꽃을 높이 높이 피울 때.


내 안의 그리움이 담아낸 진초록 꽃치자 나무 수줍은 하얀 꽃으로 피어나길 소망하는지도 몰라.

여름밤 환히 밝히던 야광나무 무수한 꽃잎을 바라볼 때 나를 떠올렸던 그대여, 이 시절이 끝나면

어느 푸르름이 무성한 한그루 느티나무의 모습으로 올까 기대해도 될는지.


*photo b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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