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문제들을 나로부터 찾는 이야기
누군가와 정말 돈독한 관계일지라도, 애써 외면한 척했지만 단 한마디로
그간의 관계랑 상관없이 서운해질 때가 있다.
그 순간의 날카로움은 마치 종이처럼 나에게 위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얇은 날로 이내 생체기를 내어 버린다.
종이 한 장으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리라 생각했던 내 손에
피가 송글 맺히고 나면,
왠지 칼이나 찰과상으로 난 상처보다 더 예리한 아픔이 느껴진다.
상대의 의도가 뭐든지 간에 그 한마디가 내게 그돟록 서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와 나 사이를 유지하기 위한 나의 노력을 모르는 듯한 뉘앙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고생과 노력들은 관계의 깊이에 비례하게 늘 존재했다.
굳이 꺼내어 확인시켜주기에는 그 진정성의 빛이 바래버릴 수 도 있기에
나만 고이 간직하는 성질도 가지고 있지만,
상대가 어쩌다가 알아차렸을 때 더 돈독해지는 묘미가 있다.
그 묘미를 항상 곁에 두고도, 우리는 익숙함과 '나의 고됨'으로 인해
상대방을 '나의 고됨'에 기준하여 저울질하다가 결국 자신을 몰라주는
상대를 자극하고자 한마디 내뱉게 되는 게 '서운한 말 한마디'이다.
서운함을 비춘 그 말 한마디는, 오롯이 자신의 답답함에서 비롯한 것일 테지만,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예고치 않은 사건이라
내뱉은 당사자의 작은 의도에 비해 듣는 입장은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믿음으로 맺어져 있을 경우,
그 한마디가 왜 나왔는지를 알아차리고 '그럴 수 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상대의 서운함을
녹이는 이가 있는 반면,
그 얘기를 듣고 자신의 숨겨둔 서운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서로의 서운함이 맞부딪혔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해주기보다는
내 감정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일 수 있다.
좋은 친구, 애정 어린 연인, 부모형제 등등
이 모든 관계의 사이에
'서운함'이라는 단어가 드리울 때는
어쩌면 우리보다 나를 더 소중히 하는 관점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를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이지만
'혼자'가 될 수 있는 수많은 거리들을 제공한다.
'우리'를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함께'가 될 수 있는 수많은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서운함이 들 때면
'나'와 '우리'를 위해 좀 더 상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행복한 우리가 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