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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Jan 17. 2021

거의 끝이 보이는 배짱이의 최후

마늘단편 - 맛없는 맛집 소설 







 이 곳 필리핀 민도르 섬에서 가장 좋다는 (민도르섬의 빛나는 미슐랭 별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레스토랑에서 코스 메뉴 중 여섯 번째로 나온 바나나 아이스크림 팬케이크를 먹을 때 즈음이었다. 한산했던 레스토랑의 주방 안에 있던 셰프가 요리를 하다가 뛰어나 올 정도로 무척 시끄럽게 내 스마트폰의 전화벨이 울렸다. 방수용 가방 안에 넣어둔 가방이라 허겁지겁 찾아서 전화를 받아 누군가 했더니 내 주거래 은행이었다. 왜 은행에서 나에게, 그것도 토요일에 이렇게 홀로 해외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전화가 오나 해서 받아보니 (난 해외에 있을 때는 전화를 잘 안 받고 급하게 약속하거나 만나는 걸 싫어한다.) 내 통장 잔고가 10만 원 미만이 돼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보통 때는 아무리 거래가 오래된 은행도 잔고 따위로 전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게, 뭐가 문제지요?"


라고 답하니,


"아, 아니. 신용카드나 적금 중 좋은 상품들이 있어서..."


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정중하게


"아닙니다. 잔고는 10만 원으로도 충분해요."


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일곱 번째 메뉴인 오리지널 이탈리언 에스프레소 (메뉴판에 그렇게 적혀있다.)를 마시는데 문득 내 통장에 10만 원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7년 전부터 <배짱이의 최후>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곧 그 소설의 결말이 나게 될 것 같았다. 두 달 전에 만난 동생이 내가 그간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다는 말에,


"한. 심. 해!!!"


라고 말한 것도 떠오르고. 다행하게도 이 곳 필리핀에 10일 정도 머물기 위해 나는 1,000불 정도를 환전해두었다. 그리고 2주 뒤에 갈 일본 항공편과 개인 온천이 방에 딸린 료칸도 5박 6일로 이미 예약, 결제까지 완료해두었다. 그다음 달에 갈 두 달간의 유럽여행에도 머물 숙소들과 항공권까지 미리 결제해두었다. 1.000불을 아껴 쓰면 한 두 달 간의 식대는 해결될 것이다. 잠시 잔고 생각을 접고 여덟 번째 메뉴로 나온 수제 브랜디 오렌지 주스를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잠시 접었던 잔고 생각이 물에 던진 비닐처럼 쫙 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10여 년 이상 사용해 온 내가 가진 두 개의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를 했다. 꽤 오랫동안 신용등급이 잘 유지되었고 그래서 주말인데도 꽤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었다. 카드회사 두 곳에서는 그간의 내 신용도를 바탕으로 외제차 3-4대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카드 한도를 늘려주었다. 6개월간 카드를 써서 발생된 금액은 수수료 없이 6개월 뒤부터 갚아나가면 되는 서비스도 추가해주었다. 그리고 내 부동산과 그간 들어놓은 적금과 주식을 담보로 저금리 담보대출까지 가능하다고 답해주었다. 나는 아직 대출까지 받아본 적은 없기에,


"나중에 필요할 때 전화할게요.".


라고 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온 점원이 계산서를 테이블에 두고 갔다. 갑자기 나는 화가 났다. 거의 완성될 뻔한 내 소설 <배짱이의 최후>의 완성이 더 미뤄지게 된 것에 대해. 나는 홧김에 잔고가 10만 원 정도밖에 없다는 통장의 돈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뒤에 그만큼을 페소로 계산해 모두 테이블 위에 놓고는 자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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