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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Mar 18. 2021

버선발 사장님, 아니 사모님

마늘단편- 맛없는 맛집 소설







 오래간만에 맛있게, 아주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이 <산카메>라는 음식점은 지워지지 않으리라. 행복한 마음에 지갑을 열어 계산서에 쓰여 있는 만큼 지폐를 세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잠시 앉아 식 후의 여흥을 즐긴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손님은 나밖에 없는 실내에서 큰 창을 통해 비가 오는 밖을 본다. 슬슬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와서 그런지 뒤 쪽에서는 테이블을 치우는 소리도 들리고, 식기들을 세척하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조금 그러고 있으니 빗방울의 크기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비는 여전히 제법 내리고 있었다. 긴자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적당한 몰을 찾아 들어갈 때까지는 이 비를 맞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비 맞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세차게 내리는 편은 아니라 후드티셔츠의 모자로 머리까지 덮은 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열 걸음 즈음 걸었을까? 뒤 쪽에서 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뛰어나왔다. 나는 놀라서 뒤를 쳐다봤더니 산 카메의 사장님, 아니 사모님이 작은 우산을 들고 내 앞까지 와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나에게 일본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내 손에 우산을 쥐어 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THANK YOU.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녀 역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아리가또,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대답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훑어본 그녀의 옷차림은 식당에서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발만큼은 아니었다. 방 정리를 하다가 급하게 뛰어나온 것처럼 버선발만 신고 있었다. 버선은 천으로 발 모양과 비슷하게 만들어 종아리 아래 발까지 신는 물건이다. 흔히 무명, 광목 따위 천으로 만드는데 솜을 두기도 하고 겹으로 만들기도 한다. 얼마나 급했으면 신발도 제대로 안 신고 버선발로 뛰어나왔을까. 잠시 감동했다. 손님에게 우산을 챙겨주기 위해 버선발로 비에 젖은 거리를 뛰어 온 사장님, 아니 사모님. 우리는 수차례 고개를 숙였다가 폈다 하며 감사의 인사 같은 것을 했고 이윽고 헤어졌다. 굳이 비를 피하기 위해 몰에 갈 필요가 없어진 아는 나에게 우산을 주기 위해 뛰어나온 사모님을 생각하며 무작정 걷기로 한다.


'그나저나, 버선발은 한국의 물건 아닌가? 왜 그런 버선을 일본분께서. 혹시 재일 교포 아닐까? 내가 한국 사람인 걸 눈치채고 이렇게 친절하게 하신 걸까? 아니야, 이 정도 음식점에서 이 정도의 환대는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이 비닐우산 얼마나 한다고.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주는 것까지는 흔치 않지. 혹시,...'


라는 등의 생각으로 혼자 공상하다 보니 굳이 비를 피하러 갈 필요가 없던 긴자 식스에 도착했다. 도쿄의 새로운 럭셔리 쇼핑몰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가장 핫 한 곳이다. 디올, 에르메스, 루비통, 헤뮬랭, 질 산더,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내가 좋아하는 모든 브랜드는 다 입점해 있는. 기왕 온 김에 쇼핑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에 찬찬히 긴자 식스를 둘러본다. 질 산더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해서 지갑을 열었다. 보통 여행을 할 때는 그때그때 쓸 만큼의 현금을 인출해 둔다. 오늘 아침에 5만 엔 정도를 인출해 지갑에 넣어두었다. 보통의 경우는 신용카드를 쓰지만 왠지 신용카드를 쓰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데 지갑에는 5만 엔은커녕 5천 엔도 없지 않은가. 왜일까. 왜일까. 다시 지갑을 덮은 뒤 업장 밖으로 나왔다. 아침에 분명 5만 엔은 넣어 두었는데, 왜일까. 왜일까. 몰 안이지만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득 비가 맞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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