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들어오기
영어시간은 여전히 곤혹이었고 내게 해민은 신경쓰이면서도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재연에게 들은 혜지와의 이야기도 그렇고, 지나친 장난 때문에 말을 섞고 싶지 않아지는 참이었다. 해민 역시 요즘 들어 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기에 그 애와 나 사이에 약간의 쿨 타임이 지속되는 시기였다.
혼자만 떠들고 다니는 '여친' 소리도 이제 같은 반이 되어서 다시는 꺼내지 못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영어시간에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 영어 시간을 건너 뛰어야 하루가 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포의 시간이 다가오고 수업이 시작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해민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하나를 뽑는다.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바보야 씅질을 냈어야지. 왜 가만히 있어!
여느 때처럼 불편한 심정을 가지고 수업에 임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what's the date today?"
선생님이 데이트 관련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해민이 말한다.
"너, 나랑 데이트할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뜬금없이. 순간 가슴이 확 달아올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내 마음을 대신 해 준건
주변인들이었다. 웃어대는 해민의 친구 유건과 "허-얼" 외마디 어이없음을 내뱉는 혜지.
기가 막혔다. 이런 이야기를 애들 있는데 대놓고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역시 나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다.
기막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차례 데이트 이슈가 지나가고 이제는 별 것 아닌 걸로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책에 뭘 써달라고 해서 써주고 책을 밀었더니 "왜 미냐?" 한다.
"그럼 밀지."
잠시 후 심드렁하게 답한 내게 복수라도 하듯 내 책을 보고 베끼더니 보란듯이 공책까지 주욱 밀어버린다.
황당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유건의 말이 더 황당하다.
"좋아하냐?"
"어."
단번에 해민이 답한다.
"둘이 사겨라? 야 해민이가 너랑 사귀재."
내게 집중된 시선.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야 싫대."
"싫으면 시집가."
유치한 말로 대답하고야 만다.
나를 사이에 두고 오간 두 사람의 대화로 다시금 마음에 전기가 일어난 듯 가슴이 찌릿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