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프리오의 비극
세월은 무심히 흘렀다. 바바(원래 이름 춘자)는 오십 줄에 들어섰고, 눈부신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두 오빠와 언니의 생활도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기회만 되면 조금이라도 더 바바의 달러를 뺏어 쓸려고 잔머리를 굴렀다.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이야기 해 두는데,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두 오빠와 언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바를 위해 희생했던 어릴 때의 정신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바바에게 뭐라도 하나 더 해주기 위해 된장을 보낸다, 김치를 보낸다 하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을 하느라 날마다 우체국을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잔머리 굴리는 가족이란 두 오빠와 언니의 자식들, 곧 바바의 조카들을 말한다. 조카들 중에서도 가장 잔머리를 잘 굴린 사람은 단연 경기도 양평에 사는 용녀였다.
배운 것 없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데다 막내 동생을 집안 유일의 고등교육자로 만들기 위해 희생하다보니 두 오빠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춘자가 미국으로 떠나고 한참 뒤에야 결혼을 했다. 언니만 초청장과 함께 날아 온 돈으로 미뤄두었던 결혼을 했으니, 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양평 용녀는 언니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니 용녀를 비롯해 조카들은 모두 바바가 미국으로 건너가고 난 뒤에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바바는 처음부터 미국에 있는 돈 많은 이모와 고모일 뿐이었다. 그 말고 다른 혈연적 유대감이나 정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사람이 바로 양평 달빛 마을의 용녀였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비슷했다. 바바의 키를 20센티미터 쯤 줄이고, 몸무게를 20킬로그램쯤 늘리면 바로 용녀가 되었다.
평생 가족들을 속이고 홀로 미국 땅에서 사람으로부터 받는 정서적 보살핌 대신 오직 명품을 즐기고,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즐거움만 탐닉하며 살았던 바바의 유전적 기질을 100% 물러 받은 사람이 양평 용녀였다. 최근만 해도 갱년기에 접어든 바바가 힘들어 한다는 소식에 바바의 언니, 곧 용녀의 친정 엄마 점순 여사가 미국에 갔다 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용녀가 냉큼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미국 가면 가방 하나 얻어다 줘요. 루이비똥으로, 알았지? 꼭!”
몸이 좋지 않다는 이모에 대한 안부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오직 명품 타령만 늘어 놓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용녀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바바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는 갱년기 증상이라고 했지만 바바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평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오직 화려한 껍데기 생활을 해 온 부작용이었으니, 자신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신체적 통증들은 공허한 내면이 내는 마음의 신음이었다.
바바는 점순 여사가 오면 이번에야 말로 사실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점순 여사를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기가 제법 괜찮아졌다면서도 먹는 것이 다 어디로 가는지 얼굴은 해쓱하고 핏기도 없었다.
이제 겨우 육십인 점순 여사는 고개를 숙이면 정수리가 휑할 정도로 머리숱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보다는 오직 동생이 잘 되기만 바라는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것은 일찍 부모를 여읜 탓에 엄마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막내 동생에 대한 태생적 연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동네 어귀 한 번 나가지 않고 오직 바바의 몸종 노릇만 하다가 돌아가는 점순 여사에게 바바는 조카들에게 주라며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그때 용녀 몫으로 준 것이 가방이었다. 가장 큰 조카인데다 자신을 빼다 닮았기 때문인지 용녀에게 정이 많았다.
그렇지만 용녀가 젊은 시절 자신만큼이나 겉치레를 좋아 하고 허세를 부리는 점은 싫었다.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조카들에게는 오래전에 명품 가방을 하나씩 주었지만 용녀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다. 대신 백화점에서 산 가방을 하나 보낸 적이 있었다.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값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바바가 이번에는 용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더 강하게 들어 점순 여사 편에 가방을 하나 보냈다.
그 가방은 웬만한 직장인 서너 달 월급보다 많은 헤르메스 가방이었다. 한국에서는 루이비똥이나 구찌, 샤넬이 유명하지만 진짜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헤르메스 가방만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바바가 그랬다.
1년 전, 아직 갱년기가 오지 않아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까불며 다니던 그때, 한인 회장이 주최하는 디너 모임에 들고 갈 가방이 없다며 징징거리자 바바킴이 프랑스 출장 때 사다준 것이었다.
바바킴의 무대 뒤의 여자로 살고 있었지만 미국 동포 사회에서는 돈 많고, 잘 생기고, 가정적인 미국 남자와 결혼해 꿈을 이룬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그 비결은 예의 바바킴의 잦은 해외 장기 출장 때문이었다. 징징거려 받은 가방이었지만 바바는 그 가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한 디자인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바바는 그 가방을 한인 회장이 주최한 그 디너 모임에 딱 한 반 들고 간 뒤 옷장에 쳐박아 놓기만 했다.
가방을 점순 여사 편에 보내면서 바바는 명품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조카들이 알면 서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점순 여사는 워낙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그 가방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용녀는 명품을 워낙 좋아하니 헤르메스를 금방 알아볼 것이고, 당장 카톡으로 “이모, 이거 진짜지?”하고 물어 올 것이 뻔했다. 그러면 ‘큰 마음 먹고 보낸 것이니 잘 들고 다녀’라는 멋진 멘트를 날릴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바바의 헤르메스 가방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문제는 그 안에 디카프리오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디카프리오는,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바라나시 실크로 만든 스카프였다. 천 값만 해도 엄청난데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놓은 진짜 금실 자수는 정말 황홀했다.
디카프리오는 칸 영화제 기간 동안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에서 열린 한 자선단체의 기금 마련을 위한 경매에 나온 물건이었다. 경매에 나온 물건들은 한순간에 세계적인 명품이 되어버렸는데,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 경매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경매장은 세계적인 여성 패션잡지 하퍼스바자의 집중 취재를 받기도 했다.
디카프리오는 이 경매 행사에서 여성용 핸드백을 하나 구입했고, 두 번째로 구입 의사를 밝힌 것이 디카프리오였다. 하지만 디카프리오는 그날 디카프리오를 낙찰 받을 수 없었다. 바바킴이 1천 달러를 더 질러 디카프리오를 낙찰 받았기 때문이다. 경매가 끝나고 디카프리오는 날뛰는 말상을 한 하퍼스바자 여성 기자에게 왜 디카프리오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 하는 그 분의 진정성이 저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그는 전 세계 여성 팬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흔들어 놓기도 했다. 물론 하퍼스바자의 말상 여기자는 바바킴에게 왜 디카프리오를 디카프리오에게 양보 하지 않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바바킴이 그날 디카프리오와 낙찰 경쟁을 벌이면서까지 디카프리오를 구입하려고 했던 것은 오랜 세월 무대 뒤의 여자로 살게 한 바바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보상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세계적인 스타 이다보니 약간의 호기심과 오기가 발동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른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 사연이 있었으니 디카프리오는 바바가 용녀 몫으로 준 가방보다 몇 곱절 더 값나가는 명품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돈을 떠나 바바킴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라 바바는 디카프리오를 무척이나 아꼈다.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강했으면 디카프리오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애지중지 했겠는가?
바바는 그런 디카프리오를 찬바람이 도는 계절에 아주 가끔, 그것도 중요한 모임에나 살짝 걸치고 나갔다. 그 디카프리오가, 예정에 없던 한국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