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56 ©박남준 시집,『적막』2005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주)창비
창비시선 256
©박남준 시집,『적막』2005
22쪽
나는 그래
그곳은 아무도 모른다.
단언컨대 누구도 존재하냐고 물을 수도 없는 곳이다.
그때도 지금도 감추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만든 곳이라 한때, 착각했던 날들.
요만큼 지나고 보니 감추고 싶은 것보다
보듬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도, 일도, 가치도, 심지어 과거의 나도 들어간 작은 공간.
터지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고
다시 또 들여놓기엔 잃은 것들에 대한 마음이 서글프기에
나는 '쪽문의 창'을 만들기로 했다.
나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을,
'흰빛에 갇힌 것들'을 신봉하기로 했다.
애매하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따금 친구들도 부르며.
내가 버린 존재들이자, 버리고 싶어 안달 난 존재들이며
동시에 버릴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존재들의 기웃거림.
모두가 겨울을 지나온다.
모두가 봄을 맞이하며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의 그곳은 아무도 모른다.
언제든 '눈 덮인 숲'을 들어갈 수 있는 이유다.
이곳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겨울을 나는 중-.
적막,
난 적막 속에서 진정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