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시집,『담장을 허물다』2013
여행 준비 없이 바닷가 민박에 들려
하룻밤 자고 난 아침
비누와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퐁퐁으로 샤워를 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몸에 행주질을 하면서
나 몸이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뼈와 피로 꽉 차 있는 가죽그릇
수십년 가계에 양식을 퍼 나르던 그릇
한때는 사람 하나를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1960년산 중고품 가죽그릇이다
흉터 많은 가죽에 묻은 손때와
쭈굴쭈굴한 주름을 구석구석 잘 닦아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오래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창비
창비시선 365
©공광규 시집,『담장을 허물다』2013
72-73쪽
나는 그래
바락바락 씻고 나면 반들반들해지는 기분.
마음도 조금의 이물질 없이 깨끗하게 닦아내,
뭐든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한 상쾌함.
가만 보니 달콤한 건 손에만 물들고
쓴 말은 입만 들락거리고
분노의 송곳은 한 곳만 집중 공략이니
다, 자기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들이미는구나.
아, 사람도 그러하다.
그는 꼭 발뒤꿈치만 걷어차고
그녀는 늘 귓바퀴에 들러붙고-
- 세상엔 담기 싫은 게 너무나 많다.
거울을 보며 퐁퐁으로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수천 가지를 닦아낸다
상처투성이 민들레를 바람에 다 날려 보내지 않으려 애쓰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강단 있게 나를 닦는다
열심히, 위한다.
내일 식탁에 올라갈 땐 오늘보다 더 '이름다운 사람'이길 바라면서,
그런 날, 최대한 '오래 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내일도 하기 위해서-
닦아낸다, 몸과 마음을, 그리고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