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무 시집,『고단』2013
인적 없는 밤
보도블록만 내려다보며 걷는데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 하필
이 고요한 길에서
닮은 사람을 만났을까
그러니 주위 사람들 내 맘 같지 않다고
비탄해할 것 없네
외로운 길 가다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 닮은 이는 곳곳에 잇고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네
그래서 마음은 닫혀도
길은 열려 있는 것이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39
©윤병무 시집,『고단』2013
110쪽
나는 그래
그녀와는 일 년에 한 번 만난다.
해야 할 일을 다 미뤄두고 그동안 못했던 얘길 나누는 친구와는 다른.
그녀와 나는 보통 말할 순서를 정하고 대화를 시작한다.
그녀가 먼저 출발하면
난 한참 있다가 출발하는 식.
도착지도 사전에 공유하지 않아서, 우리의 말들은 늘 길을 잃는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마주치는 것'인데,
그것이 나와 그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방식이다.
간혹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다,
순간 간략한 눈인사로 대화를 대신하지만
참 다행인 점은,
그 짧은 침묵으로도 충분함을 안다는 것
서로가 걸어온 길을 훑지 않아도 조급하지 않다는 것
'전혀 모르는' 그녀로부터, 나로부터-
그렇게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