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병아리 Mar 29. 2023

맛에는 장벽이 없어야 한다

사랑합니다 갓뚜기!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다 피곤 증이 몰려올 때면 장난기도 함께 스멀스멀 고개를 내민다.

  선생님들의 옷을 만져보며 “오늘 흰색 티셔츠 입었네요.”라고 물으면 어떤 날은 “맞아요.” 하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아닌데요.” 하며 당황해하기도 한다.


  “근데 무슨 색인지 어떻게 알았어요?”

  “알긴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엉뚱한 소리 하는 거죠.”

  “아 뭐야 색깔은 보이는 줄 알았잖아요. 속았네. 속았어.”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컵라면 용기를 만지작거리며 “이건 ‘ㅇㅇㅇ’ 라면이네.”라 하여도 여지없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홀랑 속아 넘어와 어떻게 알았냐고 질문들을 던진다. 시시때때로 장난기가 발동하는 내게 옆자리 선생님은 ‘짱구’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다. 


  얼마 전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팀의 막내가 “선생님! 컵라면 용기에 점자가 찍혀 있어요.”라고 한다.

  매번 속여 먹는 나에게 오늘은 반대로 이 녀석이 공격을 가해 오는 건가 싶었다. 귀가 솔깃해지는 걸로 보아 꽤나 고단수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매번 우스갯소리로 ‘만지면 다 알 수 있어.’ 큰소리쳤던 말들이 이제 엉뚱한 소리나 거짓이 아닌 현실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용기 겉면에 라면 이름과 함께 ‘매운’이라는 점자가 각인되어 있고, 끝에는 x자가 붙어있었다.

  검색을 통해 전자레인지 사용 가능 여부에 관한 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x는 사용 불가, o는 사용 가능이라는 뜻이었다.

  물 붓는 선의 위치는 물론,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바탕은 검은색, 점자는 흰색으로 표시한 추가적인 섬세함까지 그분들의 노고와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도 라면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라면 못지않게 맥주도 즐기는 애주가이다. 맥주를 딸 때의 그 경쾌한 소리와 첫 모금의 청량함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음속 저 밑바닥에 자리한 답답함까지 ‘펑’ 하고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중에서도 ‘ㅇㅇ’ 맥주를 특히나 좋아한다. 물론 타제품 중에도 맛있는 맥주는 넘쳐나지만, 굳이 이 브랜드의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캔 위쪽에 ‘ㅇㅇ’이라고 제품명을 점자로 표시해 준 이 회사만의 차별화된 ‘다름’ 때문이다.


   같은 가격에 맛도 좋고 품질도 좋은 제품이 여러 개라면 다음으로는 소비자의 입장을 얼마나 더 고려하고 반영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점자 표기가 되어 있는 대다수의 캔 맥주에는 ‘맥주’, 캔 음료에는 ‘음료’라고만 표기가 되어 있다. 시각장애인들도 캔의 크기와 모양 등으로 미루어 보아 맥주인지 음료인지는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 사이다인지 콜라인지, 맥주라면 어떤 브랜드의 맥주인지, 정확한 제품명이 알고 싶은 것이지 이런 보여주기 식에 불과한 표기법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크나큰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방법은 지금까지도 충분했다, 더 이상의 변명이나 핑곗거리를 찾기보다 이제는 시급한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시각장애인의 편의 증진을 위해 그리고 취약계층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신 모든 분께 박수를 보낸다.

  ‘맛에는 장벽이 없어야 한다’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ㅇㅇㅇ’ 회사의 관계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전 07화 택시 안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