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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병아리 Jan 30. 2023

10%의 어떤 것

10%를 90%처럼

  나의 병명은 녹내장이다. 총 두 번의 전신 마취를 통한 안구 적출 수술을 하였다.


  녹내장은 눈에서 받아들인 시각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신경에 병증이 생겨서 특징적인 형태학적 변화와 그에 따른 시야 결손의 기능적 변화를 보이는 질환이다. 전 세계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실명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첫 번째 수술은 일곱 살 때였다. 수술 전이었는지 아니면 후의 일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병원 복도에 서서 울고 있는 나를 안아 들고 아버지께서 초콜릿 과자를 사 주셨던 일, 이상하게 그 한 장면만 유독 기억에 남는다.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병원 안에서 유명한 악동이었다 한다. 담당 선생님 말고는 그 누구도 눈을 만지거나 볼 수조차 없게 했다고…. 간호사나 다른 의사가 눈에 붙여 놓은 거즈에 손이라도 대려 하면 발로 차고 그 자리에 누워 병원이 떠나가라 울어댔다고 하셨다. 이제는 많이 들어서인지, 정말 기억이 나서 인지도 모르게 그때 그 장면들이 더없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 잠시라도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 당장에 난리가 났고 해만 보면 눈이 시리고 아파 여섯 살 때까지 업혀 다녔으며 잔병 치레도 많았단다. 부모님은 아픈 나를 업고 안 가 본 데가, 안 해 본 것이 없다 한다. 산으로 바다로 종교 단체며 병원이며 여기저기를 찾아다녔고 굿도 여러 차례나 했단다.


  그것도 모르고 사춘기 시절 “남들처럼 만들어 놓지 못할 거였으면 뭐 하러 나를 낳았냐고 왜 나는 남들과 달라야 하느냐”라고 악을 쓰며 따져 물었다. 나보다 부모님의 속이 몇백 배는 더 썩어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평생 피멍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님 마음이 어떠했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서른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심장을 내리누르는 그 피멍의 아픔이 내게도 조금씩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두 번째 수술은 25살 때였다. 안압이 너무 자주 올라 하루에 진통제 한 통씩을 먹어야 겨우 일상생활이 될 정도로 심각했다. 그래서 잔존시력이 조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사실 두 번째 수술이어서 별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수술방으로 이동하는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오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내 손을 감싸 쥐며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의 목소리에 이상하게 안정이 되면서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다.


  수술 후 며칠 동안은 잠이 깨면 통증으로 울고, 먹는 것마다 게워내며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여야 하나, 입 밖으로 삦어나오는 울음과 세상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견뎠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 선생님들은 차갑고 정도 없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상당한 오해이자 착각이었다.


  수술을 해 주셨던 담당 교수님은 다정하고 따듯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매일 회진 때마다 수술 후 나의 상태를 친절하게 체크해 주셨고, 퇴원할 때에 “심심하면 놀러 와~” 하시던 교수님들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다.


  그 큰 병원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환자를 만나고 또 얼마나 많은 수술을 할 텐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셨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아픈덴 없었고? 이전에 수술했던 그 친구도 잘 있지?” 하시며 친구와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셔서 너무 깜짝 놀랐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불빛과 색깔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시력이었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집을 찾아다니는 것부터가 첫 번째 난관이었다. 가로등 개수를 세며 골목이 몇 개인지를 구분하며 다니던 그 조금의 시력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 그래서 나만의 또 다른 랜드 마크를 찾아야 했다.


  주유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기름 냄새, 마트 바깥의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가구 가게에서 나는 나무 특유의 냄새 등으로 골목의 위치와 신호등의 위치를 파악하며 길을 다녔다.


  집안에는 전기/보일러, 현관문 열어주는 버튼까지 다 터치로 되어 있어 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 문을 여는 버튼은 터치패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조금만 시력이 있었더라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화가 솟아났다. 하지만 살아야 하니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집안 곳곳 터치로 작동을 해야 하는 모든 버튼에 스티커를 부착하기 시작했다. 현관문 열림 버튼, 세탁기와 선풍기 리모컨까지... 그래서 우리 집은 점자스티커를 시작으로 동물 친구들, 별과 달, 숫자 모형들의 스티커가 여기저기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수술 후 10년이 지난 지금은 ‘시각장애인기관’에서 6년째 근무 중이다. 중도에 시각장애인이 되신 분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해 드리고 점자(시각장애인들이 쓰는 문자) 교육을 하며 시각장애인들도 함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점자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한해 한해 교육생들을 만나고 점점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며 나 또한 많은 걸 배워 가고 있다.


  80이 훌쩍 넘으신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열심히 점자공부를 하시는 걸 보면서 너무 대단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반성도 한다.


  “어렵긴 한데 이렇게 나와서 사람들과 만나고 한 자 한자 배워 가는 게 참 재미지네요.”

  “실명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책도 읽게 되고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 담임선생님처럼 좋은 시각장애인 분을 만나게 돼서 너무 다행입니다. 본인도 어렵고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밝고 멋지게 장애를 극복한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도서관 내에서 주최하는 ‘점자 빨리 찍기 대회’, ‘글짓기 대회’에서도 우리 교육생들이 상을 휩쓸고 있어 교육 담당자로써 뿌듯하고 어깨가 슬쩍슬쩍 올라가는 건 안 비밀이다. ^_^


  교육이 끝난 후 손수 꾹꾹 눌러쓴 점자 편지를 받아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이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었다.


  어느 누군가 말했었다. 시력을 잃는다는 건 자신의 90%를 잃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에겐 나머지 10%나 되는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이 10%를 다른 사람들의 90%처럼 쓰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자,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절대 불행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오늘보다 내일 문 밖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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