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 구슬프게 흘러나오는 곡조에 순간 숨이 콱 막혀왔다.
애달픔이 켜켜이 스며든 열세 살 소년의 애절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눈 가득 물기가 차올랐다.
보릿고개란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음력 4~5월경을 이르던 말이라 한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연명하다 굶어 죽는 이들도 속출하였단다.
그 시절의 고통과 힘겨움을 감히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언급하는 것조차 죄스럽고 조심스럽다.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조각난 기억들이 뒤엉켜 가슴속을 일렁였다.
“밥은 먹었냐, 밥 먹어야지.”
살아계실 적 할머니는 늘 끼니 걱정이 먼저이셨다.
“어미야! 애가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느라 힘든가 보다, 애 밥 좀 잘 챙겨 먹여라.”
“자꾸 이리 살이 빠져서 어쩌누, 할미가 올라가서 음식 좀 만들어 줄까?”
명절에도 밥과 과일, 간식 배가 따로 나눠진 것처럼 끊임없이 음식을 내오고 또 내오셨다.
“많이 먹어라! 더 먹어. 이것도 먹고 저것도 좀 먹어 봐라.”
“할미가 너희 좋아하는 식혜도 만들어 놨다, 어서 먹어.”
‘한 끼 안 먹으면 어떻다고, 할머니는 맨날 밥 타령이야.’
때맞춰 먹을 수 있는 밥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고, 철없이 매번 투덜대기 일쑤였다.
그땐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쏟아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미안하다. 할미가 항상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 잘 커 줘서 얼마나 고맙누 그래, 고맙다~”
손녀딸의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가 당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듯 내 두 손을 어루만지시며 젖은 목소리로 늘 ‘미안하다’와 ‘고맙다’를 되풀이하셨다.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지독하게 잔인한 불운(不運)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정말 괜찮으니 더는 미안해하지도 마음 아파하지도 않으셔도 된다는 그 한마디를 끝내하지 못했다.
돌아보니 용돈 한번 제대로 챙겨드린 적 없고, 이렇다 할 여행 한 번 함께한 기억이 없다.
늘 무뚝뚝하고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볼 줄 모르던 못나디 못난 손녀딸이었다.
마지막으로 잡아 본 할머니의 앙상한 손마디의 감촉이 내내 뇌리(腦裏)에서 떠나질 않는다.
바쁘다는 변명과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핑계로 요양병원에 계시던 할머니를 한 번밖에 찾아뵙지 못했던 것이 못내 한스럽고 죄송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돌아가시기 전 부족한 손녀딸을 많이 찾으셨다 한다, 이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더라면 더 자주 찾아뵙고 조금 더 살갑게 대해 드릴 걸,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돌아오던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머리를 쓸어 넘겨주시던 손길과 다정히 이름을 부르시던 음성이 희뿌연 그리움으로 덩어리 져 내린다.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자꾸 눈물이 흘러내린다.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왜 진작 이 말을 해 드리지 못했을까, 가슴을 탕탕 치며 이제 와 아무 소용없는 후회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가락 사이로 쏟아내 본다.
어리석고 못난 손녀딸이 이제야 들리지 않을 뒤늦은 마음을 전해 봅니다, 너무 늦게 깨달아 죄송합니다.
할머니 보시기에도, 그 누구의 눈에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서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곳에선 자식들 걱정 손주들 걱정으로 더는 눈물 흘리지 않으시길, 부디 평안하시길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또 바라봅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부족한 손녀딸이 너무나도 사랑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