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는 낱개 판매를 원해요
난 원래부터 과일을 좋아했다. 밥 대신 과일을 더 많이 먹었으며 코로나 전에는 외출 시에도 과일을 지퍼팩이나 작은 통에 담아서 틈틈이 먹었다. 방울토마토나 바나나는 챙겨가기 쉬운 나의 간식 과일로 쉬는 시간에 배가 고플 때 먹기 좋았다. 대학교 2학년 때 대만으로 교환 학생을 다녀왔다. 그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도 꼬박 챙겼던 것은 과일 쇼핑이었고, 처음엔 대형 마트에서 과일을 사 먹었다. 익숙한 수박부터 당시 우리나라에선 잘 볼 수 없었던 망고와 파파야 등 다양한 과일을 접했고, 마트가 익숙해질 때쯤엔 일주일에 한 번 아침 시장에 가 일주일치의 과일 쇼핑을 했고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즐거운 열대과일 생활을 했다. 삼 년 전 동생과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2주 정도 여행을 했고,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아 머물렀다. 동생도 나와 식성이 비슷하고 과일 킬러다. 우리는 아침 일찍 놀다가 저녁은 숙소에서 자주 해 먹었는데, 숙소로 들어가기 전 아침에 먹을 과일과 요거트 등을 사서 들어갔다. 우리는 과일은 꼭 구매를 했고, 사과와 자두를 사면서 한국의 과일과 비교하며 즐겁게 먹었다. 그땐 아, 난 정말 과일이 없으면 안 되는구나! 하며 생각했었다.
과일 쇼핑이 잠잠해 진건 내가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가난한 자취생인 나에겐 과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돈을 아껴야 했으니, 과일보단 밀가루 위주의 음식을 주로 사 먹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동안은 시켜먹거나 편의점 음식을 먹었고, 내겐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과일과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자취 2년 차가 되어 갈 때쯤, 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 상사의 거침없는 가스라이팅과 모욕, 분별없는 행동에 질려 일을 그만두었고, 그만두고 나서도 한번 떨어진 자존감은 회복이 되지 않아 매일 같이 우울함과 괴로움에 거의 방에 박혀 살았다. 그래도 뭐라도 해 보려고 일기를 쓰고 산책을 가곤 했지만 혼자 있는 동안 안 좋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고 하루가 무력해져 갔다. 조금만 쉬고 다시 일을 구해야지! 얼른 회복해야지! 하는 조급한 마음에 계속 이력서를 붙들고 있었지만 가슴만 답답해져 갔다.
하루는 외출을 했다가 만난 사람들로부터 언제 일을 구할 거냐는 쓸데없는 오지랖에 ‘조금만 쉬려고요’ 하며 웃으며 대처한 날이 있었다. 8월의 한 여름 해가 질 무렵에 조금 울먹이며 집으로 향했다. 난 아직 여전히 힘들고 치유가 덜 되었는데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쉽게 타인의 마음을 헤집는지 모르겠던 날,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반대로 집도 가기 싫었다. 그렇게 동네를 실컷 방황하다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고, 속상한 마음과는 다르게 배는 고파졌다. 터덜터덜 집 근처의 마트로 들어가 마트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과일 코너였다. 아, 여기 구경하는 게 얼마 만이지.. 여름 과일로 가득 찬 진열장을 바라보며 여름이 곧 끝이 난다는 것이 생각났다. 자두, 복숭아, 수박 등을 쓱 보다가 체리로 시선이 닿았다. 체리는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만큼 먹기엔 가격이 비싸 그저 외면하던 과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비싼 체리가 마침 평소보다 조금 저렴한 금액이었고 난 체리로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렇게 체리를 집고 캔 맥주도 하나 집어 계산을 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노트북을 켜고 냉동실에 넣어둔 차가운 캔 맥주와 체리를 먹을 준비를 하는 그 순간은 아까의 서럽고 우울하던 순간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게 나, 아직은 견딜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리는 새콤하고 달콤했고, 맥주는 차가웠다. 온몸이 찌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체리와 맥주를 음미했다.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 나 혹시 과일을 안 먹어서 힘들었었나? 하는 조금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매일 심심한 밀가루가 주식인 음식을 먹다가 상큼한 과일을 먹으니 죽었던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매일 바쁘고 지친 하루의 끝에 새콤달콤한 과일이 있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달콤도 좋고 매움도 좋지만 과일은 좀 더 내 몸에 상냥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 과일을 주로 사 먹었던 과거의 나, 제철 과일 먹을 생각에 설레어 하던 내가 떠올랐다. 가공식품으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하던 직장에선 먹는 내내 몸에 독을 쌓는 기분이었다. 그런 음식으론 도무지 좋은 생각이 나올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그 이후 난 다시 과일 쇼핑을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자취생이기 때문에 함부로 샤인 머스캣 같이 값 비싼 과일은 사 먹기가 어렵다. 그래도 꼬박꼬박 마트와 시장에 들러 과일의 향기를 맡으며 곧 다가올 계절을 미리 만난다. 얼마 전엔 복숭아와 자두로 가득 찬 진열장이 추석을 앞둔 지금 추석 과일로 변화가 되었고 수박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온다는 기분이 든다. 곧 감이 나오고 홍시를 먹을 수 있을 듯하다. 우리 가게 앞에는 과일 트럭이 온다. 복숭아 한 소쿠리에 오천 원이라는 녹음 음성을 들으며 현금을 들고나가 복숭아 한 소쿠리를 샀다. 복숭아는 여름 동안 가게에 방문해 주는 손님들에게 조금씩 내어드렸다. 여름만큼 과일이 반가운 계절이 있을까, 하는 맘에 같이 나눠 먹고자 드렸는데 그랬더니 단골손님께선 포도를 주셨다. 동네 이웃 할머니께선 자두 따셨다며 몇 알을 주셨다. 여름은 아무래도 과일을 나누는 계절인가 보다.
과일을 사는 것은 나에겐 단순히 먹을 것을 사는 것이 아닌 계절을 느끼고, 나를 사랑하는 가장 쉽고 확고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젠 정을 나누는 방법이 되었다. 집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두고 퇴근 후 시간을 기대한다. 오늘은 슈퍼에서 산 멜론을 잘라먹으며 수고한 하루를 마감할 예정이다. 얼른 저녁이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