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언론들에서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표현을 태고적부터 있던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러한 지식의 홍수 빠진 삶을 영위한 것이 10년도 채 안됐다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터넷이 나오기 전 하나의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찾아보고 구전으로 들어 습득하고 몸으로 겪고 눈으로 보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아로이 되새기던 정보가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 몇 번 움직임으로써 지구 반대편의 일까지 바로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어릴 때 나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다. 무언가가 궁금해지면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책을 찾아보고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또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지랄 맞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의 궁금증을 검증과정을 거쳐 정보로 저장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을 오롯이 혼자 끙끙거리며 하나하나 천천히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갔었고, 그 속에서 나만의 정보를 쌓아 간다는 쾌감은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 나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궁금증이 생기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쓰윽 움직여 몇 번 더 톡톡 거리면 그만이다. 그리고는 정보 확인 절차를 거치고는 자연스럽게 폐기해 버린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미션 전달 메시지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는 뇌에서 금세 사라져 버린다.
처음 스마트폰 속 정보의 바다를 경험했을 때는 너무나 황홀했고, 그 모든 정보들이 뇌 속으로 들어와 쏙쏙 박혀 금방이라도 척척박사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시간이 흘러 지금 나의 뇌는 예전보다 영양실조에 걸린 거처럼 비실하게 되었고, 술술 읊던 영화감독과 영화배우들의 이름을 “그, 있잖아~ 그 사람”으로 대부분 치환시켜 버렸다. 디지털 치매가 온 것인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너무나도 측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핸드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혹자는 늙어서 기억력이 감퇴할 때가 되었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지만, 핸드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는 경각심은 분명히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점점 이상한 현상들이 주변에서 하나씩 나타나고 있다. 다량의 정보 공유의 보편화가 가져다주는 부작용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몇몇의 주변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너도 나도 정보에 심취해 있다 보니 그 정보가 모두가 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것이라 착각하고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며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이다.
여행을 다녀봐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자신이 겪은 일이 모든 것 인 것처럼 단정 지어 결론을 내려버리는 여행자들을 가끔 만났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만 한 달 이상 장기 체류를 했던 여행자 앞에서 1주일 다녀온 여행자가 자신의 여행담을 자랑하듯 이야기하며 정답으로 규정짓고 다른 여행 방식을 비난하는 것을 보며 너무 부끄러움에 그 자리를 피했던 경험이 있다.
이 이야기가 여행에 대해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10명의 사람이 모이면 2~3은 꼭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이 옛날 영화와 독서, 음악 감상의 기본 3대 대중 취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사진에 대해 전문가적인 견해를 곁들여 이야기에 꽃을 피운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가끔 우스운 상황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사진을 하고 사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말을 아끼고, 사진을 입문한지 5년 미만의 사람일수록 말이 많아지며 자신의 사진관을 타인에게 주입시키고 싶어 한다. 물론 오래했다고 잘하는 사람은 아니고, 짧게 했다고 못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부터 디지털카메라까지 18년간 취미로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사진은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지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다수가 엄지를 드는 멋진 사진도 있을 수 있고, 기본이 안된 엉망의 사진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극과 극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수준의 사진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으로 선택 것 즐기면 되는 것이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의 성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가끔 일어나는 이런 불편한 상황과 마주하자면 예전 보았던 더글라스 캐네디의 ‘빅피처’라는 소설이 생각나곤 한다. 그 소설의 주제는 아니지만 유명 사진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여지를 던져 주기에 책을 읽고 한동안 대중에서 각광받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진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쭉 이어오는 유명 미술 작품에 대한 논란의 요지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들은 타인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 어떤 사진을 인정할 때는 그 사진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그 사진을 좋아함을 이야기하고, 유명인이 아닌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 혹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정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그 사람보다 아래로 내려간다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주목을 받고 싶어 하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는 타인을 인정하지 않으며 솔직히 실력 또한 주목을 받을 실력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노력 또한 하지 않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방어기제에 의해 타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대하고 낙관적이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총체적 난국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고, 그들 자신 스스로는 이러한 사실을 절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知不知尙矣, 不知不知病矣. 是以聖人之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병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병이 생겼고 그 병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아픔은 생각까지 전이되어 아픔이 몸과 마음으로 까지 번져간다.
그 병의 유일한 치료제는 자신의 지식을 맹신하지 않고 자신보다 타인의 지식의 깊이가 더욱 깊을 수 있으며, 자신이 아는 것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과 스스로 부족하고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리쌍의 노래처럼 겸손은 힘들다. 하지만, 스스로 겸손을 겸손으로 인지하지 않고 행동하고, 그 행동을 타인들이 겸손으로 받아 들일 때, 비로소 불치병 같은 앞에서 말한 병을 완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잘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모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고 사랑하여도 충분하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각자 다 존재의 이유가 있고 사랑받기에 충분하다. 굳이 증명하려 죽을힘을 다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할 필요는 없다. 타인으로 부터의 인정보다는 스스로 부터의 인정이 수백 배는 더 소중하다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