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슬픔이 간직한 진정한 깊이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755일간 60개국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755일, 2년 1개월이라는 시간을 돌아보면 찰나의 순간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월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어찌하다 보니 60개국이라는 숫자의 나라를 거쳐왔었다.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우연의 선물로 머물게 된 케어먼도 있었고, 한국 쇼 프로그램을 보다 흥미가 생겨 즉흥적으로 방문했던 자메이카도 있었으며, 치안의 문제 때문에 입국 당일 바로 뚫고 출국을 했던 온두라스도 있었다. 그동안에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와 경험이 많았지만, 우스운 것이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신선했던 충격들과 새로움은 평생 뇌의 한 곳에 주름으로 잡고 자신만의 영역을 굳건히 할 거라 믿었지만, 새로움이 겹겹이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새로움은 무뎌딤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억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얼마 전 아픔으로 기억되는 세월호 2주기가 있었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많은 의혹들과 의문 속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남긴 글을 보다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놀라웠던 사실은 그 기억과 경험이 무척이나 강렬하였고 많은 고민과 생각을 던져주었던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 기억의 파편으로 언저리에 박혀있다는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다시 방문하고 싶은 몇몇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다. 쿠바도 그중 하나의 나라이다. 마지막에 한 번에 몰아서 골탕을 먹기는 했지만, 그것만 뺀다면 쿠바의 여행은 우리에겐 잊히지 않을 한 곳임이 틀림없다. 수도 아바나의 느낌도 좋았지만 좀 더 쿠바스러운 쿠바가 궁금해진 우리는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적은 산티아고 데쿠바까지 내려갔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와는 다른 쿠바만의 멋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보내던 산티아고 데 쿠바의 첫날 저녁 아바나에서 일면식이 있던 대만 친구들과 우연하게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까사에 대한 약간의 불만이 있던 우리에게 그들이 묶고 있는 까사를 추천해 주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만 친구들이 체크 아웃하는 날 그 방으로 다시 체크인을 하며 멜리나의 까사에 묶게 되었다. 친절한 주인과 그 가족들, 앉아서 쉴 수 있는 테라스,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지내다 떠날 것이라 믿었지만, 역시나 사건 사고는 항상 예상을 빗겨나간다. 그 까사에 묶는 첫날밤 갑자기 옆방에서 남자의 소리가 들리다.
“Melina, mojito una mas por favor.”(멜리나는 그 숙소의 주인아주머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이어졌고,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멜리나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매번 술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날은 멜리나도 화가 났는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목소리를 점점 커졌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목소리 주인공의 방에서 주인아주머니의 방을 가기 위해선 우리 방을 지나가야 하는 구조였는데, 아마 방에서 나와 아주머니의 방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새벽마다 잠을 깨우는 “Melina, mojito por favor.”에 인내심도 바닥나 버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그 정체 모를 목소리의 주인공과 대면하였다. 며칠간 감지도 않은 듯이 엉클어진 머리와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어딘가 모를 위축되고 무기력한 모습의 서양 남자가 서 있었다. 나를 본 것인가? 아니면 나를 보지 못한 것인가? 그는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Melina, mojito por favor”를 외쳤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와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한데, 조용해주시겠어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는 아세요?” 그제야 그 남자가 나의 존재를 인식한 듯 초점 없이 무기력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똑같은 말 “Mojito por favor” 그의 애절한 눈및에 순간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순간 멜리나가 방에서 나왔다. 금방 모히또를 가져다주겠다며 남자를 달래 방으로 들여보내고 주방으로와 럼과 허브, 라임을 꺼내 모히또를 만든다. 멜리나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묻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자라고 하고는 남자에게 모히또를 가져다주러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 무언가 밖이 부산스러워 잠을 깼다. 밖을 나와보니 열려있는 남자의 방문 사이로 여러 사람이 보이고, 남자가 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결국 남자는 엠블란스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아침을 먹으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멜리나의 남편인 안드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남자의 이름은 샘으로 호주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엘리트이다. 샘과 멜리나가 인연을 맺은 건 1년 전 멜리나의 까사에 묶으면서였다. 그 당시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고 슬픔을 이겨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이곳 산티아고 데 쿠바에 방문하여 한 달을 보내고 갔었다고 한다. 그 당시 멜리나의 집에서 지내며 슬픔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밝게 쿠바를 떠났는데 1년이 지난 뒤 샘 혼자 산티아고 데 쿠바를 다시 방문한 것이다. 호주에서 조금씩 아픔을 치유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아내가 심장마비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 버린 것이다. 아내를 떠나보낸 충격과 아내가 너무 그리워 아내와 함께 1달을 보낸 추억이 있던 멜리나의 집에 다시 오게 되었지만, 그 슬픔을 이겨 내기가 쉽지 않아 밤마다 그렇게 술을 찾았다고 한다. 1주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다 결국은 쓰러져 엠블란스에 실려 병원으로 실려가 버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샘이 받았을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순히 술주정뱅이 혹은 약쟁이 정도로 취급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고 샘에게 너무 죄스러웠다. 아이를 잃고 연이여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는 슬픔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 머나먼 타국 땅으로 혼자 돌아온 기분과 그 추억과 마주 하였을 때 밀려오는 슬픔을 오롯이 혼자서 받아내야 한다는 느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내를 잃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차오름에 어찌할 바를 모를겠는데 샘의 심정을 어렴풋이도 그때의 나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 사건이 있고 이틀 뒤 외출을 마치고 까사로 돌아온 나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사과의 말을 건넨다. 건강한 모습으로 병원을 퇴원한 샘이었다. 새벽에 보았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모습으로 하고 나타난 샘은 며칠간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픽업하러 온 택시에 몸을 싣고 그렇게 그날 그는 사랑하는 이들이 다 떠나버린 혼자 남겨진 일상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렇게 뒤집어 해석을 해보고 또 다른 시각에서 해석을 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어떤 미술품을 보고 나서는 그 시대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혹은 말도 안 되는 상상력과 추론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노는 것을 즐겨한다. 하지만, 샘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땐 둘 다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십여분을 침묵으로 이어갔었다. 그렇게 쿠바의 따가운 햇살 아래 서늘한 십여분이 흐르고 나서 아내가 “오빠는 절대 나 먼저 두고 가지 마.”라는 말을 툭하니 뱉어 놓았다. 나지막하게 “응. 절대.”라는 대답과 함께 아내의 손을 잡고 산티아고 데 쿠바의 고즈넉한 길을 따라 산책을 나갔었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5살쯤 처음으로 키우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며 죽음과 맞이 했던 적이 있었다. 누나들과 함께 초를 키고 강아지가 죽지 않게 해달라며 빌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간절하게 강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누나들이 초를 커고 빌고 있었기에 동질의식에 따라 했던 것뿐이었던 것이었고, 누나들이 슬퍼하기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 슬퍼하는 척 따라 했었다. 그 당시 나이에 죽음이란 것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고 슬픔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마음이 익지 못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당시 커다란 산과 같이 무섭고도 단단한 존재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며 흐느끼는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죽음의 무게를 모르던 그 당시에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간혈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첫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나이 어린 친구의 돌연사와 지인의 교통사고, 그리고 여행 중에 보게 되었던 수많은 죽음들과 사건들. 그때마다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지만, 한 번도 소중한 사람의 갑자스러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샘의 사연과 몇 개월 전 한국에서 날아온 믿을 수 없었던 비보가 묘하게 섞이면서 스스로의 죽음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져 있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변의 죽음까지 스포트라이트가 넓어졌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무게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였었는데, 어떻게 그동안 그 소중한 기억의 존재를 잊고 있었을 수가 있었을까? 또 한 번 스스로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살면서 가장 고통스럽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은 언제일까? 취업에 실패했을 때? 사랑에 시련을 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앞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희망이 없을 때? 아니면, 시한부의 죽음 선고를 받았을 때? 사람마다 그 선택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겐 어느 순간일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어느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술에만 의지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뒤 따라갔다고 하는 것처럼,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야 말로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자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고통이 아닐까 싶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죽는 사람은 죽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의 삶도 없지만 고통도 없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그 사람의 죽음이 남기고 간 흔적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이겨내야 하기에 죽은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욱 가혹하지 않은가 싶다. 사회는 마음껏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사회가 허용한 짧은 시간 안에서 농축된 슬픔을 쏟아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예전 그대로 흘러간다. 그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세상이 허용하는 선은 거기까지 만이다. 정말 자신 없는 일이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슬픔이 떠난 이 보다 더욱 짙은 건 이런 이유에서 아닐런가 싶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다. 무수히 많고 많은 시간들이 흐르고 흐른 뒤에서야 아픔이 조금은 무뎌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평생을 죽음보다 아픈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일 밖에 없다. 보잘것없고 미미 한일 일지 몰라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곬
슬픔은 터지는 것이 아니다
자작하게 우려져 스며들어 버린다
지우려 들수록 선명해져 또렷하게 반사되기에
덮어둘 수밖에 없는 그리한 것
잿빛 흩뿌려진 하늘에 뺨을 스쳐 떨어진 빗방울처럼 불쑥 찾아오고
흔들림이 멈출 줄 모르는 나무 마냥 으스된다
원점이 없이 솟구쳐 올라 당황스럽다가도
이내 흠뻑 담겨져 자아를 놓아 버린다
주체를 내어주고 그렇게 사그라져 사라지길 기도해도
얄궂게도 알몸으로 짖벗겨 졌을 때 사그라든다
네 입속의 혀처럼 검붉어짐은 모두 오롯이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