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라면 극복기

좋은 기억으로 덧칠할 수 있다

by 아녀녕

[ 가을: 제4부 ]



사람들마다 음식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 안 좋은 기억이 오래 남아 특정 음식에 손이 가지 않게 되는 일도 꽤나 비일비재하다. 삶은 흰 계란과 김치라면이 나에게 있어서 그런 음식이다. 단적인 예로 냉면 위에 올라가는 흰 삶은 계란을 숟가락으로 건져 내어 일행의 그릇에 살포시 올려두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는다면 젓가락으로 계란을 그릇 귀퉁이로 보내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내가 유달리 특정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된 까닭은 어린 시절 음식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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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란을 삶아 주면 그 자리에서 두세 개는 순식간에 까먹던 아이였고 기차 안에서 간식 카트가 지나갈 때에도 부모님은 나를 위해 삶은 계란을 자주 사주셨다. 그래서 시골을 내려갈 때에도 엄마는 어김없이 우리를 위한 간식으로 삶은 계란과 여러 종류의 과일들을 챙겼다. 그 당시에 시골에 내려가려면 자동차 이외에는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출발을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갈 때 친절하게도 길을 안내해 주는 네비게이션이 없었고 인터넷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고속도로 길 안내책을 펼쳐서 여정을 재확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시대 때 어른들은 참으로 용감하고 대단했다.) 엄마는 차 안에서 모이를 주는 어미새 마냥 우리에게 간식을 끊임없이 챙겨 주었고 나는 간식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였다. 장시간 차 안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먹은 삶은 계란이 그만 얹혀 버리고 말았고 덕분에 나는 극심한 체기를 경험했다. 귀성길 행렬로 인해 차가 막혔던 터라 차 안에서 보낸 몇 시간은 나에게 삶은 계란을 미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만 미워해도 될 터인데 매우 소월 해진 탓인지 아직까지도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흰 계란의 친구 격인 맥반석 계란은 또 맛있게 먹는다. 아무래도 희지 않고 연한 갈색빛이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해 주고 찜질방을 갔을 때 계란을 친구와 도란도란 나누어 먹던 좋은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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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라면과 관련된 기억은 매우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친구네에서 자주 놀곤 했다. 친구네 부모님 모두 맞벌이를 하셨기에 친구는 혼자 밥을 챙겨 먹기 일쑤였고 그날도 놀다 보니 우리는 금세 배가 고팠다. 친구는 나에게 김치라면 한 봉지를 꺼내와 끓여 먹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라면을 좋아하긴 했지만 김치라면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냄비를 꺼내어 물을 붓고 라면과 스프를 부어 넣을 때 냄비 안쪽에 눌어붙은 뭔가를 보고 말았다. 제대로 닦이지 않은 냄비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끓어가고 있었고 나의 허기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친구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기에 매우 맛있다며 먹어 보라고 권했다. 김치라면이 가진 특유의 김치맛임에도 그 맛이 꼭 냄비 안에서 만들어진 이상한 맛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더 먹을 자신이 없어 친구에게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이십 년 넘게 김치라면과 척을 지며 살아왔다.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을 좋아했지만 김치가 들어간 국물에 면이 들어가는 순간 입맛을 잃었다.


그만큼 김치라면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일 년 전 캠핑을 다녀온 뒤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캠핑을 간 일행이 한 번 먹어보라고 권했던 김치우동으로 말이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즐거운 캠핑 분위기 속에서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국물만 한 번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한국자를 덜어냈다. 사실 면을 제외하면 김치찌개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조심히 국물을 먹어보았다. 그 맛은 예상 밖의 맛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김치라면의 맛은 온데간데없고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날을 이후로 김치라면은 더 이상 안 좋은 기억의 일부분이 아닌 좋은 기억으로 덧칠해진 음식이 되었다. 어색하게 알고 지낸 친구와 우연치 않은 계기로 급속도로 친해지듯이 김치라면은 빠르게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쌀쌀하고 흐린 날씨에는 자주 생각이 난다. 이렇게 보면 정말 사람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안 좋았던 기억도 평생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언젠가 흰 삶은 달걀도

좋은 기억으로 덧칠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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