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빠져 지냈을 때 주인공의 아버지 우광호가 내뱉은 대사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다 정치적이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인간관계는 다 계산적인 것 아닐까.
친구와 밥을 먹을 때 얻어먹기도, 사주기도 싫었다. 괜히 마음의 빚이 생기는 기분이 어서였다. 가령 내가 식사 한 끼를 대접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고마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다음부터 계산대에 나서기 꺼려진다.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밥을 사는 행위를 통해 상대방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사고팔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친구가 회사 업무 스트레스에 대해 한참을 쏟아냈다. 다 들어줬는데 반대로 내 스트레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잘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 않아 진다. 그건 아마 내심 공정한 상담 서비스 거래를 바랐기 때문 아닐까.
거래가 아니라면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호의를 베풀더라도 내심 보답받기를 바란다.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는 물질적, 정신적 거래에 따라 이뤄진다. 결국 사람은 다 계산적이다. 손해만 보고 사는 사람은 그저 뜯어먹힐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계산적이어야 한다.
출근하기 전 나는 거래를 위해 버스 정류장 근방으로 향했다. 당근 마켓 어플로 책을 한 권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첫 중고 거래. 나는 중고거래에서 등장하곤 하는 빌런들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어떻게 대처하지? 내 생각에 당근 나라는 생존을 위해 치열히 싸워야 하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첫 거래 목록으로 책을 선정한 까닭은 소위 진상들을 만나도 큰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였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품인 만큼 부담감이 덜 했으니까.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데 마침 지갑에 현금 6천 원이 있는 게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책값과 딱 맞아떨어졌다. 현금을 잘 쓰지 않아 굉장히 오래 지갑 안에 있던 차였다.
'그냥 현금만 툭 건네면 뭔가 실례 같은데.'
2번이나 접혀서 방치돼 있던 돈은 펼쳐보니 구깃구깃하여 별 볼일 없었다. 잠시 편의점 앞에서 봉투를 살까 고민했다.
‘에이, 봉투값이 아깝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인데.’
결국 주머니에 6천 원을 대충 접어 넣었다.
약속 장소에 가자 누군가 종이 가방을 안고 앉아 있었다. 단박에 거래자임을 알아보았다.
"혹시 당근 거래하러 오셨나요?"
거래자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 네."하고 대답했다.
땡그란 안경에 화장기 없는 얼굴,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 책을 거래해서 가지는 편견일까. 학교 독서 동아리원일 거 같단 생각을 했다.
거래자가 아무 말없이 종이봉투를 두 손으로 건넸다. 책을 대충 확인하고 나도 말없이 주머니에서 대충 접은 6천 원을 꺼내줬다. 거래자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고 나도 간단한 목인사만 건네고 헤어졌다. 손에 든 쇼핑백을 보다가 '나도 봉투에 넣어서 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슬슬 출근 시간이 아슬했기에 쇼핑백을 대충 던져 놓고 회사로 향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야 내용물을 확인했다. 종이백을 거꾸로 들어 툭 털어내니 책과 함께 웬 과자 한 봉투가 툭 떨어졌다. 읽으면서 먹으라고 넣어줬나. 무심하게 접어 건넨 6천 원이 한 번 더 떠올랐다.
보잘것없는 돈으로 책 한 권, 종이팩, 과자 한 봉지를 얻었으니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을 텐데 나는 이 거래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대체로 손해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더 많은 것을 받아내기 위해 내가 베푼 조그만 것을 되도록 크게 포장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부유한가?
그녀는 왜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이런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까. 단순한 자기만족? 모르겠다. 다만, 나는 손해 보지 않으려 애썼음에도 그녀보다 가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