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동안 출근할 때를 제외하고 사람을 만나지 않은 적이 있다. 일이 바쁘단 핑계를 대며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유 없이 우울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적당히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다지 큰 비극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는 게 재미없었다. 어떤 일이든 그다지 애쓰고 싶지 않고 딱히 새롭게 하고 싶은 것조차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을 텐데, 자신보다 훨씬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조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텐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혹시 내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걸까. 애써 멀쩡해 보이려 했다. 별로 웃고 싶지 않아도 미소를 지었다. 그럴듯한 여가 활동을 하고 있는 양 꾸며댔다. 잘 지내냐는 부모의 전화에 아무 일 없다며 힘차게 대답하곤 했다. 그 짓은 시간이 지날수록 꽤 버거워졌다. 나는 점점 방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출퇴근 말고는 외출하지 않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침대에 눕기 바빴다.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적당히 배가 불러오면 핸드폰을 바라보다 잠이 드는 나날을 보냈다.
그날도 핸드폰을 하다 잠에 들려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초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녀석은 집요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성가시다 못해 짜증이 나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갔어, 이놈.”
시선이 녀석을 따라 허공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방구석에 있던 봉투 틈새로 숨어드는 놈을 포착했다. 녀석이 빠져나오기 전에 잽싸게 입구를 움켜잡았다.
"잡았나?"
반투명한 비닐 너머 검은색 점 같은 게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다. 포획을 확신하여 봉투 입구를 재빠르게 묶어버렸다.
“뭐지?”
비닐을 얼굴에 가까이 대보니 검은색 몸부림이 추가로 발견됐다. 둘, 셋, 넷.. 대체 몇 마리인지. 벌집을 건드린 것 마냥 봉투 안에 수많은 점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아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퍽.
흐뭇한 과육이 뭉개지는 소리. 발가락으로 봉투를 조심스레 들춰보았다. 비닐 바닥에 갈색 액체 따위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도무지 포장할 수 없을 정도로 썩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널브러진 옷가지, 바닥을 구르는 페트병, 배달 음식을 먹고 치우지 않아 썩은 내를 풍기는 쓰레기들.
‘이게 사람 사는 꼴이 맞을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문득 자신이 시체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있고, 썩은 내를 풍기며 날파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자신은 반쯤 시체인 거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쓰레기 산은 아마 제 무덤이 아닐까. 결함 있는 인간은 시신조차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는 거다.
"나한테 딱이네."
습관적으로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않게 툭 튀어나온 말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머릿속을 휘집었다.
언젠가 봤던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기분 나쁜 책이었다. 「인간실격」 주인공 요조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혐오했다. 그는 익살꾼을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을 꾸며내곤 했다만, 되려 타인의 입맛대로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자기혐오와 상처. 괴로움에 시달리던 요조는 마약에 손을 대고 자살까지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그는 정신 병원에 갇히게 된다. 이해와 공감이 필요했던 주인공은 최후의 순간까지 그냥 미친 사람, 인간 실격자 취급 되어 철저히 단절된 생을 마감한다.
인간에게 상처받는 요조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았다. 요조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왔다. 요조보다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때문에 나는 힘들어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지나친 나약함을 탓하며 기분 나쁘게 바라봤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요조가 이해되는 듯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반복되는 출퇴근길에 마모돼버리는 인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에, 내심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모습조차 혐오스럽기에 스스로 고립되고, 상처받으며 곪아갔다.
나는 갑자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뜬금없이 달리기가 하고 싶었다. 대체로 지쳐있었기에 가능하면 힘든 일은 하지 않고 살았다. 땀이 나고, 숨이 차므로 뜀박질은 언제 마지막인지 모를 정도로 하지 않았을 터였다.
오래간만에 힘쓰는 폐덩이는 마치 채찍질이라도 당하는 듯 기분이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호흡에서 슬며시 피맛이 느껴졌다. 아직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여력 한 방울이 남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3층 건물을 마지막 목적지로 삼아 뜀박질을 계속했다.
쓰러지다시피 도착하여 건물 돌계단에 주저앉았다. 쿵쾅거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가슴이 뛰고 있는지를 잊고 살았다. 그제야 갑자기 달리기가 하고 싶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