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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Oct 26. 2024

퇴근 후 쓸데없지만 유익한 일

“퇴근하고 뭐 하려고?”

집에 가기 몇 시간 전. 직장 선배가 내게 물었다. 보통 이 질문은 ‘별일 없으면 술이나 먹으러 가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부터 독서 토론에 참석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괜히 ‘저는 독서 모임에도 참석하는 교양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잘난 척을 하는 듯 해 말을 흐렸다.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핑계처럼 보였는지 선배 표정이 조금 섭섭해 보였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되도록이면 독서 모임 따위에 참석하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독서 토론? 네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볼 거라 생각되서였다.


이전에 이사를 했다. 숙소를 나와 새로 들어간 원룸촌은 버스 터미널 옆에 위치해 교통편이 좋았다. 당시 자가용이 없는 탓인지 동네에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회사 동료 몇몇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이사 온 기념으로 그들을 집에 초대했다.

짐이 많지 않아 내 방은 어딘가 살풍경해 보였다. 침대, 옷걸이, 그리고 책장 하나가 거의 전부였다. 집들이에 온 동료 한 명이 그 모습을 쓱 살피더니 한 마디 내뱉었다. 

"야, 이런 쓸데없는 거 읽지 말고 좀 도움 되는 책을 읽어라."     

어딘가 언짢은 말투. 집에 뭣도 없는 주제에 책장을 두고 소설책을 꽂아놓은 꼴이 허영 부리는 것처럼 보였나. 딱히 할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걸 읽고 있지?’     

나는 작가가 아니다.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소설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소설 따위를 읽어봤자 동전 한 푼 나오지 않는다. 실생활에 써먹을 구석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허영 부리기 좋아하는 좀 재수 없는 놈이라서겠지. 하지만 나는 밥맛 떨어지는 놈이기에 순순히 인정하진 않기로 했다. 비록 동료 말에 답은 못했지만 나는 내가 책을 읽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있었다.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준 미리엘 주교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거기서 내가 찾던 그럴듯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교는 낮에 마당의 조그만 뜰을 정성껏 가꿨다. 밤이 되면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는 이 두 가지 행동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정신도 뜰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루는 한 부인이 뜰을 가꾸고 있는 주교에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 같은 것을 심지 왜 쓸모도 없는 꽃을 가꾸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교가 대답했다.

"아름다운 것은 유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익합니다."      


우린 모두 머릿속 뜰을 가꾸며 살아간다. 자격증, 경제 상식, 외국어 등 어딘가 쓸모 있는 지식들. 그건 이를 테면 샐러드처럼 먹을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이다. 이십 대 초반, 매일 같이 시험에 쫓기면서 그다지 관심도 없는 전기, 기계 지식 등을 배웠던 건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그 행동이 무용한 짓거리는 아니었을 테다.

여러 갈등과 마주하지만 어찌 됐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쩌면 그 자체로 아름답다. 소설책이 쌀 한 톨 가져다주지 않을 무용한 것일지라도 내겐 유익했다.

만약 내게 뜰이 있다면 나는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잔뜩 심을 거다. 그리고 한편에는 먹을 수도, 쓸데도 없는 것들을 심을 거다. 쓸데없을지라도 그건 마찬가지로 사는데 유익한 일일 테니까.

       

언젠가 만난 한 친구가 술을 먹다 자기 윗옷을 슬쩍 들춰 보였다.

'뭐야, 벌써 취했나?'

입꼬리를 일그러뜨리고 육두문자 한 발을 장전했던 찰나였다.

"너 어디서 맞았냐?"

생각했던 거와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놈의 몸뚱이 곳곳에 시퍼런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짓수를 하다 다쳤단다. 녀석이 다친 곳은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가벼운 발목 염좌에, 갈비뼈 실금, 손가락 인대 파열, 여기저기 들어있는 멍자국. 도장에서 수련을 빙자한 폭행이라도 당하는 걸까.


"요즘 매일 같이 다닌다."

그런데도 씩 웃으며 자랑스레 말하는 친구 녀석.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걱정된 마음에 잔소리가 절로 나왔다.

"야, 네가 무슨 선수도 아니고 쓸 데.."

주둥이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반쯤 나온 '쓸데없이 그런 짓을 왜 하냐.'는 핀잔을 집어삼켰다. 미리엘 주교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욕을 대신해 친구에게 말했다.      

“야 이 자식아, 다 좋은데 적당히 해라, 적당히.”

술잔을 들다 친구가 다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야, 000은 요즘 뮤지컬을 배우는데, 거기 군기가 장난 아니라더라. 엄청 혼나면서 배우고 있대. 왜 돈 내고 혼나고 있냐고 말하려다 참았다. 나도 돈 내고 다치고 있으니까."

그 모습들이 생기 있게 보였다. 우리는 쓸데없지만 유익한 일을 하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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