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닫혀있던 방문을 열자 후덥한 공기가 나를 덮쳤다. 문득 시원한 맥주가 간절해졌다.
'한 캔만 마시자.'
샤워를 마치고 잠옷용으로 입는 후줄근한 반팔, 반바지로 재빨리 환복 했다. 곧바로 흰색 크록스 신발을 신었다. 집 앞에 편의점으로 향할 요량이었다.
"문이 열립니다."
핸드폰을 하면서 대충 1층 버튼을 눌렀다.
...
잠시간 정적. 엘리베이터 씨가 왜 조용하지? 원래라면 누르는 층수를 친절하게 읊어주셔야 하는데? 다시 몇 번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다른 층수를 눌러봐도 역시 반응이 없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되는 순간, 조용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어?"
버튼을 연타해 봤지만 엘리베이터 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덥고 습한 밤. 나는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곧바로 긴급호출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도 그 버튼만은 정상 작동했다. 잠시간 통화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밤이라고 안 받는 건 아니겠지?'
문이 닫히고 나서부터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이대로 누군가 발견해 줄 때까지 갇혀있어야 한다는 비극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언젠가 한 번씩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상상을 해보긴 했다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통화음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네, 여보세요?"
사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도감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재빨리 내 위치를 설명하고 갇혀있음을 알렸다.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 보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이 이 상황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안 되는 거야."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딱히 할 일이 없던 터라 괜히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다시금 눌러봤다. 그러자 갑자기 엘리베이터 씨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1층에 도달해 버렸다. 엘리베이터 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배신감에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긴급호출 버튼을 눌렀다.
"네, 갑자기 작동이 돼서 지금 문 열렸거든요. 근데 일단 확인은 한 번 해보셔야 할거 같아요."
관리실 직원이 어딘가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듯 해 나는 재차 확인해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 말썽을 부릴까 염려스러워 나는 한동안 그 앞을 서성였다. 그러던 와중 엘리베이터가 위층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가 갇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층수를 주시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씨를 타고 1층에 도착한 사람은 땀을 삐질거리고 서있는 나를 슬쩍 흘겨보고 지나쳤다. 정상 작동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괜히 엘리베이터 씨에게 배신감이 더 깊어지는 것만 같아 터덜거리며 본래 목적이었던 맥주를 사러 갔다.
흰 봉투를 하나 손에 쥐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타야 하나.'
층수를 보아하니 엘리베이터 씨는 정상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버튼을 눌러봤다. 엘리베이터 씨는 다시 친절하게 올라간다는 안내음과 함께 문을 활짝 열고 나를 기다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가증스럽게 보였다. 나는 나를 한 번 곤란하게 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시치미 떼는 엘리베이터 씨를 도무지 신용할 수가 없었다. 기어코 14층을 계단으로 올라갔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착해서 먹은 맥주는 어딘가 썼다.
별다른 조치 없이 엘리베이터는 정상 운영되었다. 다음날 출퇴근길, 속 좁은 나는 여전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루 더 계단을 이용했다. 너 왜 나한테만 그랬어? 엘리베이터 씨를 괜히 흘겨봤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엘리베이터씨 도움 없이 혼자 14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싫으면 다시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 계속해서 의심해 봤자 속 좁게 행동하고, 사서 고생하게 된다. 너도 섭섭한 게 있었겠지. 그동안 너의 노고를 잊고 살았던 탓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