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직장을 당장 그만두진 않았다. 바라는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변화가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자기개발을 하기로 했다. 헬스장에서 p.t를 등록하고,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고, 여러 자격증을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동기 부여 영상 따위도 찾아보면서 변하고자 했다.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강력한 게으름을 갖췄단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가는 건 핑계뿐이었다. 약속이 있어서, 전날 과음하는 바람에, 일이 고된 하루여서 등등.
언젠가부터 동기 부여 영상을 봐도 시큰둥했다. 문득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일기장을 펼쳐봤을 때 내가 적은 '열심히 살자'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꼴값 떠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너저분한 방구석. 일기장 속 자신을 비웃었다. 이전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때로 누군가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한다.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기. 상대방의 허점을 비난하기에 애쓰면 자괴감을 가질 틈이 없어진다. 세상에 나보다 못난 놈들 천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뜬금없이 동기 부여 영상 따위에서 위로나 격려를 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책이나 강의를 팔아먹으려고 그럴듯한 얘기나 지껄인다면서 그것들은 볼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내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까닭도 그 책을 비난해보고 싶어서였다. 책 내용이 뻔히 보이는 듯했다.
‘죽음이 만연한 수용소에서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는 뭐 하는 거냐. 대충 그런 소리를 하고 싶나 보지.’
책에서 말했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나는 그 확신에 찬 말을 읽고 갑자기 폭발해 버렸다. 잔소리 좀 그만해라. 대체 왜 그렇게 애쓰면서 살아야 하지? 사람들이 아등바등 사는 이유는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편하다는 생각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향하려는 곳은 편한 상태 즉, 긴장이 없는 상태이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세상엔 노력하고 투쟁하라는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이 때로 사람을 쥐어짜는 듯하다. 어차피 도착지가 긴장이 없는 상태라면 굳이 노력, 투쟁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에 적당히 만족하고 살면 되지 않나.
그렇다면 적당히 만족하는 삶, 긴장이 없는 상태란 무엇일까. 갑자기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방구석에서 쓰레기와 나뒹굴며 멍하니 핸드폰을 하는 자신. 그것도 긴장이 없는 아주 편한 상태이긴 했다. 다만, 사람 사는 꼴 같지는 않았다. 시체와 비슷한 형태였다. 나는 적어도 그런 상태를 바라진 않았다.
빅터 프랭클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히 읽어보다 자유 의지로 정한 가치있는 목표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살면서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