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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Sep 16. 2021

엎어진 김에 쉬어 가겠습니다

쉬는 것이 어려운 나에게

오전 집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커피 대신 캔맥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이런 것도 ‘일탈’일까? 이 시간에 술이라니. 


왼손에 맥주 오른손에 리모컨을 들었다.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정주행 한다. 

벌써 몇 번째 다시 보기인지 모른다. 

창문을 살짝 열어놓았는데 바람이 꽤 들어온다. 

맥주 때문에 시원한 것인지, 바람 때문에 시원한 것인지 모르겠다. 

딱 한편만 보려고 했는데, 결국 두 편이나 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만 아니라면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읽다 둔 신문을 마저 읽었다. 


아이들이 없는 점심은 대강 때워도 좋다. 

싱크대 선반에 반찬용기가 많은 것을 보니 냉장고에 먹을 것이 별로 없겠다. 

냉동실에 넣어둔 식빵 한 조각과 참치 통조림에 마요네즈를 섞어 튜나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어제 커피 수업에서 내려온 핸드드립 커피에 우유를 넣어 라테도 만들었다. 

명절을 앞두고 주문한 싱싱한 귤이 도착했다. 후식으로 귤 2알을 까먹었다. 


바람이 시원하길래 옷장 문을 다 열어젖혔다. 

옷 가지 사이사이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든다. 

바람이 좋아 베개 커버도 빨았다. 

흔들리는 베개잎을 보니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책을 좀 읽다 문득 ‘이런 것이 호사지.’ 싶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생활 3년 차에 결혼을 했고 3년 후 엄마가 되었다. 


나는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더 어렵다. 

아직도 특별한 일정 없이 집에 있자면 왠지 불안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쉬어지는 내가 오늘은 정말로 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벌써 휴직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쉬는 것이 어색한 것을 보니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었나 보다. 


나 혼자 쉬는 것이 미안해 남편에게도 휴직을 권했다. 

손사래를 치며 싫다고 한다. 

본인은 일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오히려 내가 집에 있으니 본인도 편하게 일할 수 있고 아이들도 안정감이 느껴진다며, 

쉴 수 있을 때까지 쉬라고 한다. 

진심이다. 이 남자. 


휴직을 하면 큰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평온하다. 

호사가 별 것이냐? 

이렇게 쉴 수 있다는 것,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것이 호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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