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외갓집에서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집이나 동네 영화관을 다니셨다. 그리고는 내가 너무 어려 이해 못 하는 영화 줄거리와 옛날 당신이 겪으셨던 이야기를 하시곤 하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포근한 외할머니의 등과 이해 못 할 당신의 한숨 등이었다. 내가 취학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아지랑이 같은 기억 밖에 없지만, 당신의 서사는 어린 나에게 많은 영감의 씨앗을 남기셨다.
나이가 오십을 넘기고서야 외할머님의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야기가 사라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이들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겠지만, 그런 얘기를 해줄 어른들도 부재하다.
사르트르의《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은 "인간은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이며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 쌓인 채 살아가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목도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보고, 삶을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나, 그러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를 말이다."라고 말한다. 작금의 시간대는 이야기가 없는 분초단위의 시기로 나아간다. 모든 정보가 스마트하게 처리되는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지니, 할머니의 옛이야기조차 그 안에 갇혀있을 뿐이다.
방송대를 통해 국어국문학을 뒤늦게 접하면서 느낀 요즈음의 문단사정은 애처롭다.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분들이 많은 방송대에서 특히 국문학 전공은 기성 문단의 작가분들도 계셨다. 에세이나 詩 등을 다루는 분들을 만나 교감을 나눈 것도 나에겐 행운이었다.
고령화 문제가 사회현상이 된 것은 이제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계의 사정은 더욱 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젊은 층이 전무할 정도로 각 문단의 구성원들은 고령자분 뿐이다. 설령 부푼 꿈으로 당선되어 등단의 희망에 젖을지라도, 시상식에 가면 너무 노쇠한 분들만 있는 광경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나 또한 그런 분위기와 기승전결 있는 그 고령자 분들이 흡족할만한 글쓰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여정의 경험을 한 분들도 계실 것이다. 브런치 글쓰기에는 각 연령층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물론 실물로 확인한 바는 없지만 말이다. 기껏해야 자기소개 글이나 프로필란의 조그만 사진으로 보는 것이 전부이다. 본 적도 없고 대화도 없는 수많은 작가분들과의 대화라고 해봐야, 알량한 댓글 주고받기로 어림짐작할 따름이다.
종이로 접하는 책하고는 질량이 다른 전자화면상의 글 읽기는 나름 편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의 휘발성이 강해 기억에 뚜렷이 남지 않는다. 내용이나 전체적인 인상이 훌륭한 글들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병마에 시달리는 글이나 결혼관계의 배신에 대한 인기 많은 글을 대할 때, 내용의 쇼킹함에 매료되어 라이킷을 한다는 것도 좀 서글퍼진다.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좋아요를 누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브런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쉽게 스마트폰을 터치만 하면 찾을 수 있는 정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정보가 과연 나에게 유용하고 이로운 것일까? 우리가 별생각 없이 접하는 수많은 정보는 오히려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라는 세계의 수많은 인종과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야 없겠냐마는, 우리는 굳이 알필요도 없는 정보를 접하면서 괜한 걱정과 우울을 겪고는 한다. 정보를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과정도 문제가 된다. 좀 더 자극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려 사실을 증폭시켜 진실을 호도하는 과정에 누군가의 여과 과정은 생략되기 일쑤다. 바야흐로 믿을만한 서사(敍事)는 전무하고, 어지럽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문구들만이 가득한 혼돈의 바다를 떠다니는 느낌이다.
얼마 안 되는 계절이 오가는 사이 세상은 무심해지고 있었다.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그 편리함과 중독성에 디지털 파놉티콘(원형감옥) 안에서 놀라고, 울고, 웃으며 자신의 견고한 창살을 만들어간다. 과연 이것이 인간의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감이 없는 삶은 현상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간혹 뉴스거리가 되는 청소년 일탈의 사건 보도는 하나같이 이런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나 또한 부유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이전의 삶과 이후가 너무 극명하게 다르기에 한편으론 걱정이 앞선다. 편리함의 이기(利器)에 저항이나 이의제기조차 못하고 매몰되어 가는 일상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외할머니가 한강을 처음 건너오셔서 낳은 딸이 어머니라고 한다. 할머니의 그 말씀은 그 이후의 여정을 동년배의 친우분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나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입모양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었지만, 두 분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씀 속에서 자라났다. 우리 모두는 살아오며 이야기라는 거대한 레퍼토리를 짊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이전의 자료는 삭제되는 현재의 삶은 감성마저도 리셋시키지 않을까 모르겠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이미 오염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