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사를 간다. 아버지 취직이 안 됐다고 한다.가게에서 번 것으로는 생활이 안된다고 하신다. 가게를 넘기고 근처의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엄마는 할머니를 불편해하셨다. 할머니도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엄마를 싫어하는것 같다. 작은 엄마가 오면 그렇게 살갑게 구시면서, 울 엄마는 같이 살면서도 눈치를 준다.이 전에 같이 살아봐서 안다.
그래도 같이 가니까 좋다. 나 혼자 할머니 댁에 있으면 좀 쓸쓸하다. 가게를 하고 한참있다가 여기 와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만삭의 몸이다. 또 동생이 생기나 보다.
"엄마! 오빠가 항아리 깼어!"
"으이그! 그럼 그렇지!!"
저것이 또 일러바친다. 별로 쓰지도 않는 항아린데........ 살짝 치우면 됐는데.......,
"너 나가서 놀아! 훼방 놓지 말고!"
차라리 잘됐다. 사촌동생 주선이와 바로 앞산에 오른다. 고모아들 주선이와 나는 한 살 터울이다. 거의 동갑이라 싸울 때가 많다. 고집이 황소 같다.구슬치기를 하다가 자기가 졌어도 끝까지 우긴다. 그래도 둘이 놀 때가 재미있다.
주선이와 집 바로뒤 불암산에 오른다.
산 자락이 온통 분홍빛이 감돈다. 진달래가 산을 뒤덮었다. 가는 길에 나무작대기 하나씩 꺾어, 칼싸움도 하고 시냇가에 돌도 들춰 가재를 찾는데, 낯익은 아이가 내려온다. 호야가........, 맞다.
"호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호야도 반가운지 씨익 웃는다. 엄마가 퇴원하고 식당일을 하신단다. 내년엔 학교도 보내준다고 했단다.나에게 한글 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너!....그럼 나한테 선생님이라고 해야 돼!"
나는 으쓱거리며 말했다. 호야도 대뜸, 나를 선생 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 말이 우스워 깔깔거렸다.
호야를 데리고 이사한 할머니 집으로 갔다. 아직 짐정리가 안된 우리 방은 엄마가 장롱의 모퉁이를 맞추고 있었다. 호야가 성큼 올라가 엄마를 돕는다.
"아고! 호야 왔구나!...., 저 녀석은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쯧"
엄마는 호야의 손을 잡고, 나를 노려보신다. 하긴, 내가 봐도 호야는 그런 일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우리 집에서 밥 먹을 때도 설거지를 돕겠다고 엄마손의 그릇들을 가지런히 씻어놓곤 했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일머리도 없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할머니가 아버지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셨다. 나를 보시더니 우리 장손 왔냐고 반겨주신다. 할머니 하고는 두 번째 같이 살게 된다. 이문동에서 살 때 할머닌 싸늘하면서 속이 깊으신 분이란 걸 알게 되었다. 유난히 나에겐 잘해주셨다.
둘째 삼촌 예비군복에서 천 원짜리가 떨어져 있었다. 동네 친구들을 끌어모아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러 갔다. 그래도 돈이 남아 극장 안에서 뻥튀기를잔뜩 사줬다. 집에 가니 할머닌 내 운동화를 사다 놓으셨다. 나에게 신겨보시더니..."손버릇 나쁜 놈 신발까지 신겨주네".... 나는 머리카락이 쮸뼜올랐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담부터는 그럼 안된다. 그 돈은 삼촌 거야"
할머닌 말없이 신발이 맞으니 함박 웃으셨다.
이런저런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다.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여동생이 또 생겼다. 포대기에 싼 아기를 보니 왠지 심드렁하다.
나도 웬만한 것은 안다. 아버진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할아버진 아버지를 나무랐다.
"네가 지금 술추렴 하고 다닐 때냐! 애들 추스를 생각 해야지!! "
"아버지! 못난 아들이라 죄송합니다!!"
"어미야! 들여다 재워라!"
두 분이 그런 식의 대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니, 나는 속으로 불안하였다. 가게를 할 때가 좋았다.
'우리 가족은 왜 툭하면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될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들어섰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엄마가 방에서 울고 계셨다. 아버지도 침울히 앉아계셨다. 아기가 죽었다고 한다. 어쩐지 재작년에 태어난 둘째 여동생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잘 울지도 않고, 유난히 얼굴이 빨개서 엄마도 걱정하는 눈치셨다. 애기들이 걸리는 간기라고 했다. 이름도 채 못 지었는데........, 밖으로 나가 동네 어귀에 서 있자니 호야가 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부하기 힘들 거같은데'라고 생각했다.
마루에 호야와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아기문제로 말씀을 하고 계셨다. 산자락 어딘가에 아기무덤이 많은 곳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 거기 알아요!!"호야가 말했다.
난 화들짝 놀랐다. 어른들도 놀란 눈치다. 아버지는 호야에게 자세히 묻더니, 저녁에 같이 가자고 하신다. 호야는 엄마에게 말하고 오겠다고 했다.
해가 지고, 사방이 깜깜한데, 할아버지와 아버진 죽은 아기를 사과궤짝에 포대기째 넣고, 호야가 앞장서는 산길을 나섰다. 나도 따라나서려 했지만 엄마가 붙잡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호야가 가는데, 난 왜 못 가게 하실까?' 엄마는 어른들 하는 일에 사람이 많으면 안 되니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딱 일주일 살아있을 때, 두 번인가 아기얼굴을 봤다. 엄마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숨만 쉬셨다. 아기얼굴도 이젠 생각이 안 난다.
다음날 학교가 끝나고 호야네 집으로 갔다. 호야엄마도 계셨다. 나를 보더니 밥 먹고 가란다. 불고기 반찬이 맛있었다. 식당을 다니신다더니 반찬이 좋다고 생각했다. 호야는 말없이 밥만 먹었다.
호야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펴놓고 쓰는 법을 가르친다. 기역, 니은, 디귿은 쓸 줄 아니 읽거나 쓰는 걸 가르친다. 호야에게 묻고 싶으나 꾹 참았다. 갑자기 호야가 나에게 말한다.
"너네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랬다!"
"우리 아기는 어디에..........., 있어?"
"불암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 하늘나라로 갔을 거야!"
하늘?....., 아기는.... 하늘로 돌아갔다.
아기도 자기가 있을 데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다시 하늘로 간 걸 보니......,돌아오는 길에 산자락이 유난히 붉어보인다. 아기 얼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