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언어유예

<작가라는 사람>

#발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by 사유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삶 역시 부모님과 형제자매, 연인, 자녀와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또 한 가지는 작가들의 가장 흔한 공통점, 가장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주변성, 즉 이방인의 지위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위치에서 과거의 고통이나 외로움이 비롯되었거나 지금도 비롯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들은 대부분 이방인이라는 지위를 소중하게 여긴다. 작가가 세상을 고찰하는 관점과 자격은 바로 그러한 위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바로 작가의 주변성 때문에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보르헤스와 네루다의 작품을 번역한 앨러스테어 리드는 "목소리는 모든 존재의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화신일 것이다."라고 썼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해양학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이시구로는 글래스고와 런던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했다. 그는 록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사실 이시구로는 기타리스트와 가수로 실패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p.47

제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무언가에 모든 힘과 이상을 쏟아부었는데 결국 그것이 틀렸다고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이었으니까요. 소설가는 어떤 세상이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서 로케이션 헌팅을 해서 제일 잘 맞는 곳을 고를 수 있죠. 저는 종종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역사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좀 불편해졌죠.


p.54

저는 한 사회의 관습이 다른 문화에 반드시 적용되지 않는 아주 인위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힘들게 겪으면서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가치관이란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첨예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p.60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건 제가 아직도 존경하는 본능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젊은 세대의 신조였죠. 저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노숙자들을 위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형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상황이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우리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와중에 똑같은 해악을 끼치기 쉽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점점 딜레마에 빠졌죠.


p.61-62

무엇이 좋은 삶이며 무엇이 허비한 삶인가? 저는 플라톤을 읽으면서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기란 정말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질문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동시에 저는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할 수 없으니까 그냥 포기하자는 철학적 진공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어쩌면 그런 정의는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만족스러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고, 자신이 그 생각에 미치지 못하면 무척 불행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그런 문제를 다루었지요. 제 주인공들이 이론적인 차원에서 실패했다고 느낀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부분이, 난 만족스러운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p.63

제 두 번째 소설과 세 번째 소설에 차이가 있다면, 두 번째 소설은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가치 있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삶을 충실하게 만들 수도 있고 삶을 허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었지요.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을 쓸 즈음에 저는 다른 중요한 차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감정적으로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을 낭비하는 거죠. 남아 있는 나날은 무언가에 기여하고 싶어서 평생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만 다른 차원, 감정적 차원에서는 스스로 감정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의 갈들을 다룹니다.


p.65

저와 제 문체는 좀 이상한 관계인데, 저는 의식적으로 어떤 문체를 만든 적이 없거든요. 제 생각에 가장 명확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글을 쓸 뿐이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와서 말하죠. 아, 정말 흥미로운 양식이군요, 아주 한정적이고 감정이 억제되어 있습니다, 안 그래요? 분명히 주인공과 관련이 있어요, 그렇죠? 그럼 저는 네,라고 대답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하죠. 어쩌면 내가 그런 거 아닐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집사 스티븐스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닐까? 저는 감정을 억누르는 답답한 성격의 스티븐슨이 소설을 쓴다면 정말로 남아 있는 나날 같은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어서 가끔 진심으로 걱정했어요. 네,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책에서 이야기하던 바로 그것들이, 지나치게 통제된 삶의 빈곤함이 제 자신과 제 글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저는 확실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p.70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약간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아주 유능하고 삶을 아주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은 오래전에 무너진 것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트라우마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뭔가, 평형을 잃은 거죠. 다시 말해서, 어렸을 때 절대 낫지 않는 일종의 상처를 받은 거죠. 몇 주씩 방에 갇혀서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말하자면 그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았어요. 그 상처가 절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처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책을 쓰는 행동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책을 쓰면서 우리는 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세상, 내가 기록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 과거로 돌아가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일종의 위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밖에 없죠.



p. 71

(주인공이 위로를 찾는다고 하셨는데, 책 제목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

결국 주인공은 위로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끔 그 무엇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면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하죠. 우리는 일에서, 직업적 성공에서, 관계에서 위로를 구하지만 치유에 집착하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를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p.72

소설을 쓸 때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을 피하고, 주인공들에게는 다른 상처를 만들어 주죠. 상처에 대한 아이디어는 좀 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어떤 트라우마도 겪지 않았지만 뭔가를 끝내지 못하고 남겨두었다는 느낌, 또는 제가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았다는 느낌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자라지 않았고, 일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되었다는 느낌 말입니다.



p. 73

저는 어떤 시점이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거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가끔 잘못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삶이 더 엉망이 될 수도 있고, 단순히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쁜 일에 기여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충 얼버무릴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그러면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무척 공감합니다. (...) 물론 너무 절망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1995년 6월

샌드라 라비노비치와 인터뷰 공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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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엑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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