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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Jul 11. 2023

11. 한방의 순간은 다시 찾아온다.

가드 올려!

 딱 달라붙는 트레이닝 글러브를 낀다. 운동 마치고 도장 밖을 나서기 전까지는 트레이닝 글러브를 벗지 않는다. 멋져야 하므로. 건조대에 널어둔 콩나물 대가리 모양 무에타이 글러브를 들고 구겨 넣은 신문지를 뺀다. 글러브에 습기가 차면 온종일 손에서 고린내가 난다. 땀내며 운동할 때만 쓰는 거라 습기가 차는 건 당연하지만, 고린내는 곤란하다. 킁킁 냄새를 확인하고 가방에 곱게 챙긴다. 머리를 질끈 묶고, 수건과 물, 운동복을 챙겨 나서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어쩔 수 없는 책상물림이라 무에타이도, 크로스핏도 책으로 먼저 접했다. 앞으로 겪을지 모를 고난과 쪽팔림을 대비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어떤 책도 나이와 싸우는 법을 설명해주진 못했다. 관장은 나를 흘끔 보더니, 주부 다이어트 반에 넣었다. 묻지도 않고 오전 10시 타임이라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저녁 7시 야간 타임부터 우글우글 모여드는 젊은 청년들 사이 배겨 나기 힘들게 뻔했다.

                     <그러나 늘 기록 1등이던 나>


 막내 동생의 권유로 무에타이를 시작했다. 뻘뻘 땀을 흘리는 시간이 행복하다나. 살이 좍좍 빠졌다며 동생은 날렵한 턱선을 내밀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덕에 연년생 아이 둘로부터 해방된 직후, 나를, 무엇보다 예전의 내 몸을 되찾을 시간이 간절했다. 하지만 무에타이라니.  누군가에게 무에타이를 하는 중이라 말하면, 자동 반사처럼 상대의 입에서는 “옹..박?”이 튀어나왔다. 이미 사람들 뇌리에 무에타이란 농구 골대 모양 꼬임 머리띠를 하고, 호랑이 자수가 새겨진 원색의 공단 반바지에 요리조리 발재간을 부리는 무술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어서 “무에타이라고?”라며 어디서든 폭소가 터지곤 했다.


 주 5일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무에타이에 폭 빠지게 된 이유는 ‘타격’이라는 매력 포인트 때문이었다. 복싱과 달리 킥이 주된 공격 수단인 무에타이는 펀치로 유인하고 킥으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게 핵심이다. 결정적인 킥 한방을 위해 상대의 펀치를 맞아주는 셈이다. 가드를 올린 채, 가볍게 주먹을 쥔 양손으로 코와 인중을 보호하는 건 격투기의 기본자세다. 바꿔 말하면 “가드 올려”란 ‘맞을 준비를 해’, 더 나아가 ‘아파도 참아. 기회가 온다’와 같은 의미다.


 친구들에게 운동 삼아 무에타이를 한다고 말할라치면

 “그래서 남자랑 붙어봤어?”

 “뭐가 그렇게 억울했어.”

라는 질문을 꼭 받았다. 격투기의 향유 대상이 남성이라는 점에 큰 이견은 없으나, 나의 격투기 상대가 꼭 남자여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을까. 게다가 꼭 억울한 사람만 격투기를 하는 건가 의아했다. 사실 주부반이라 누군가와 스파링을 해볼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당시 내 주된 타격 상대는 샌드백이었니까.

 “기술 다 필요 없어. 급할 땐 낭심을 질러.”

관장님이 남성의 목소리로 짚어주는 동족의 약점공략법은 더없이 진실하게 와닿았다. 무한정 샌드백을 치고 차며 전날의 울화를, 무한 재생되곤 했던 밤길에 뒤따라오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를 잊을 수 있었다.


 나를 보호하며, 가벼운 타격은 몸으로 받아 낸 뒤 힘껏 킥 날리기, 이때 터득한 싸움의 요령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는 쓰고 싶은 욕망을 좇다가 실패할 것이 뻔해지면 우회하곤 했다. 어렵게 풀리다가도 금세 한 바닥이 채워졌고, 쉽게 써 내려가다가도 한 글자씩 느리게 나아가는 게 글의 속성이었다. 늘 같은 상황의 반복이라 재능 없음에 어리석다며 자책도 했다. 그러나 어떤 자기 계발서의 예언이나 명료한 공식보다 우선하는 건,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당장의 일상과 나다움의 거리를 가늠하기란 어렵지만, 글을 쓰면서부터 세상의 펀치를 견디는 힘이 생긴다고 느꼈다. 이제는 금세 해치울 법한 글도 문장을 매만지고 생각하느라 꽤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빨리’보다 ‘천천히’ 이르려는 태도의 중요성을 깨달아갈수록 ‘쓰는 일’과 ‘유망한 미래’의 괴리는 커진다. 하지만 퇴로 없이 꽉 막힌 생각의 한계, 크고 작은 실패와 마주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돼지 저금통에 하나둘 모으는 동전, 유효타로 쌓이는 펀치처럼 비로소 ‘나다운 글’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에타이를 그만둔 지 어언 10년, 당시 다이어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최종 5킬로를 감량했고, 그중 3킬로가 근육으로 다시 늘었다. 인생 최대의 근육량을 자랑하던 시기. 그러나 첫 주부반 아마추어 1급 경기 출전 등록을 앞두고 셋째가 생겼다. 무척 튼튼한 녀석일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무에타이 도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관장님에게서 키즈용 무에타이 글러브를 임신 축하 선물로 받았고, 그때 생긴 근육으로 셋째를 무던히 키울 수 있었다는 웃픈 후일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답게 살게 한 큰 공신은 무에타이였다. 잽을 쌓아가는 요즘이다. 한 방을 날릴 순간은 필연코 다시 온다.

가드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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