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I'd love to. 17화

좋은 아버지론

by 실버레인 SILVERRAIN


조던피터슨 교수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상대는 신과 우주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동기부여의 ‘긍정적 감정’은 항상 ‘목표’와 함께 일어납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없다면 ‘긍정적 감정’은 없습니다.


곧 ‘목표’가 높을수록 그 목표로 나아갈 때, 더 큰 ‘긍정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긍정적 감정이 ‘과정’을 자극하니까요. 종교의 ‘궁극적 목표’가 그 정점입니다.


우린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는 최대한 높고 ‘위대’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정의 중 하나입니다. 성스러운 영역이죠. 궁극적 목표..!


이제 목표가 생기면 목표에 가까울 때마다 ‘힘’을 얻는데 그 진전을 에너지 삼아 달리게 됩니다. 이게 ‘도파민’입니다. ‘마약’이 주는 자극과 동일한 시스템이죠. 기분이 고양됩니다.


목표는 필수입니다. 이제 그 목표를 상상해 봅시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나 '신성한 음성'. 둘은 구분이 어렵긴 한데, 목표는 자연스럽게 정해지고 곧 일련의 ‘변화’를 촉진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가기로 결심한 뒤 여러 일을 겪어요. 모든 모험 뒤엔 ‘제단’을 쌓고, 더 ‘위’로 목표를 잡죠.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는 그가 스스로에게 위로 나아간다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고, 둘째로는 자신이 변화할 때마다 무언가를 ‘희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모험이 이끄는 변화엔 원리가 있습니다.

깊은 인격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게 되죠.

왜냐하면 변화가 클수록, 희생도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

1 이런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2 “네가 끔찍이 아끼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내가 지시한 그 산으로 가서, 그 아이를 번제물로 바쳐라.”


9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지시한 곳까지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아 올리고, 제단 위에 장작을 포개어 놓았다. 그러고는 아들 이삭을 꽁꽁 묶어 그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10 마침내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고 할 순간이었다.


11 바로 그때,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12 주의 천사가 말했다. “그 아이에게서 손을 떼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하지 말라. 네가 그토록 아끼는 외아들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바치는 걸 보니, 네가 얼마나 나를 경외하는지 이제 알겠다.”




이것은 개인의 성장담이기도 하죠. 부름을 따라 모험에 나서고, 위를 목표하며 근본의 목표를 상기해 가면서 적합하지 않은 것을 나아가기 위해 ‘모두’ 내려놓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그만큼 그의 변화가 ‘극적’인 겁니다.


야곱도 그렇죠. 야곱은 ‘이스라엘’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왜냐하면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온 길이 이름이 바뀔 정도로 변화가 컸던 겁니다.


이것이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가장 궁극적인 희생의 개념, 그것은 ‘신약’에서 완성됩니다. 궁극적인 변화는 바로 모든 걸 ‘희생’할 각오로부터 온다는 거죠.


그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불안을 방어하려는 ‘종교적 시도’가 아닙니다. 궁극적 모험이죠.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악한 모든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수용’하는 것.


이 태도는 ‘희생’이야말로 ‘공동체'의 토대라는 원리의 뿌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미래와 관계를 위해선 반드시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희생’이라는 개념을 점점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수준까지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쳐야만 했죠. 물론 돌려받게 되고 명령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가장 먼저 인생의 '모든 것’, ‘인간관계’까지도 전부 가장 높은 목표에 ‘종속’돼야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 좋은 아버지란 자녀를 가장 높은 가치에 희생해야 합니다. 자녀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죠. 믿음으로 내보내는 겁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했습니다. 마리아를 형상화한 유명 조각상이 있는데, 미켈란젤로가 스물세 살 때 그 어린 나이에 만든 명작이죠. 마리아는 아들의 시신을 안고, 처형당한 아들을 고요히 바라봅니다. 여성의 ‘십자가형'과 같습니다.


즉 ‘좋은 어머니’란, ‘진정한 아버지’란 숭고한 목표를 위해 자식이 세상에서 ‘무너지도록 ‘북돋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주제이죠.


Pieta


자녀를 ‘내놓아야’ 되돌려 받는다는 거죠. 굉장히 깊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악한 세상이어도 희생할 가치가 있습니다.


Q : 아니 저런 ‘천재’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대를 초월하는 걸까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생’입니다.


아브라함을 좀 더 말하자면, 지금 질문과 이어지거든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버지’로 불릴 기회를 주셨는데 ‘아버지’란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는 보편적 단어인데 모두 아버지가 있죠. 그러니 일종의 역할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있죠. ‘좋은 아버지’의 역할도 존재합니다.


좋은 아버지라면 굉장한 격려를 하죠. 그리고 자식이 세상에 나가 생존하도록 격려합니다. 기술도 가르치죠. 무작정 보호하거나, 감싸주지 않아요.


오히려 세상에 내보내며 “무슨 일이 닥쳐도, 네가 극복할 거라 믿는다.” “정말 끔찍하고, 아무리 도전적이라도, 악에 받쳐도, 너는 할 수 있다.” 자녀가 그런 모습을 실제로 보일 때 정말 좋은 아버지라면 ‘감사’와 ‘사랑’이 넘칩니다. 아이가 어리더라도 말이죠.


첫걸음마를 떼거나, 첫 미끄럼틀에 오르거나, 처음 보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 때, 혼자 학교에 갈 때 그 모든 순간, 밖은 위험했음에도 “그래 잘했어, 네가 잘할 줄 알았어” 그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원형적 역할을 한 거예요.


즉 핵심은 제가 앞서 ‘이기적 유전자’를 언급했듯 도킨스는 인간의 번식을 ‘이기적’이라 했는데, 아닙니다.


인간 번식은 ‘다세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의 패턴을 만들고 싶다면 그 패턴이 여러 세대로 확장되어 후손들이 다세대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하고 싶다면, ‘모험의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 '자신감'을 심어줘야 하죠. 그 패턴이 곧 ‘가문’을 만들고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번식은 훨씬 복잡합니다. 성관계만이 아니에요. ‘다세대적 헌신’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은 만약 우리가 '최대의 모험’과 용기 있게 전진한다면 시대를 초월하는 ‘의미'를 얻고 원형적이며 영원한 ‘아버지의 영’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만났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니 ‘좋은 아버지’라면 그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기독교에선 그 영이 ‘로고스'라고 합니다.) 세상의 무게를 자발적으로 짊어매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죠. 정말 엄청난 개념화입니다. 저도 맞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희생이 '공동체의 기초’라는 생각은 너무 자명합니다.


당신이 결혼했다면 거기서의 첫 번째 희생은 ‘다른 모든 여자들'이겠죠. 그게 첫 번째 희생입니다. 더 이상 당신이 아닙니다. 아내도 아니죠. 안정된 '결속'에 관한 거죠. 그리고 그 안정된 결속은 자녀들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됩니다. 그것도 희생입니다.



현재의 ‘변덕’을 포기하고 미래의 '안정'을 얻습니다. 자신의 ‘미성숙함'을 포기하고, 자녀들의 ‘성장’을 돕습니다. 모두 ‘희생’입니다.


그러니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회의 중심에 두었죠. 무의식 중에 깨달은 겁니다.


‘공동체의 안정성'은 반드시, ‘개인의 희생’과 그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즉 ‘신약'에서의 탐구는 ‘희생의 범위'에 관한 것이죠.


Q : 사람들이 십자가를 볼 때 그런 희생을 생각하나요?


사실 그건 알 수 없지만 ‘이해의 깊이'에 달려있겠죠.


A :그래서 사실 드는 생각이 이제껏 아무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도 깊이 생각하진 않는 듯한데 그저 ‘예수’가 우릴 위해 죽었다. 그러니 예수를 찬양하자.


맞습니다.


A : 너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해요.


거기엔 사실 '자비'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칼 융'이 한 말인데 '종교는 사람들을 종교적 체험으로부터 막는다.'

(형식에 갇힌 종교는 오히려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경고)


온전한 계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인데, 그것이 믿음의 토대인 동시에 그 길을 똑같이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요구입니다. 그래서 융은 기독교의 ‘고난'을 '원형적 비극'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백 명의 훌륭한 이야기 꾼이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했다고 칩시다. 거기서 ‘끔찍한 요소’들만 모아다가 하나의 이야기로 '농축' 했다면 정말 끔찍한 이야기가 되겠죠. 그것이 인생의 ‘최악의 상황’인 겁니다. 그걸 좀 분석해 봅시다.


비극의 첫 번째 조건은 ‘선한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만일 비극이 ‘악인’에게 일어난다면 그건 ‘정의’지 ‘비극’이 아닙니다. 꼭 ‘선한 사람’ 이어야 하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냥 선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모두가 인정하는 '선함'이어야 하고 정말 최고의 ‘선함'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함'때문에 핍박받아야 합니다. 그럼 이야기가 극단적으로 한정되죠.


그다음은 어떤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그 답은 ‘최악의 고통'입니다. 젊은 나이에 고통스럽게 죽는 것, 너무 이른, 굴욕적이고 부당한 죽음, 친구들의 손에 의해, 군중의 손에 의해, ‘폭군의 권력’ 아래에서, 그가 선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핍박하는 사람들. 이게 원형적 비극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거기서 발생하게 되는 ‘죽음’ 조차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며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내러티브가 ‘십자가’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예수는 '지옥의 중심’을 겪었다는 겁니다.


예수는 결국 ‘죽음’ 뿐 아니라 '악' 자체도 이긴 겁니다. 모두 초월한 겁니다.


여기서 심층적인 '심리적 메시지’는 ‘양심’과 ‘소명'이 말하는 것은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선, ‘최고의 내’가 되기 위해선 ‘최대의 가능성’을 발현하기 위해선, 지독한 악을 포함하여, 자발적으로 '최악의 것'을 짊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사실 모두가 알죠. ‘원하지 않는 상황'은 반드시 옵니다.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게 '최선'의 인생을 사는 방법인 거예요. 원하지 않는 ‘재난’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숨을 거예요? 회피할 겁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아까 나왔듯이 개신교에는 ‘방어적인(*구원파 등의 이단 교리)’ 요소가 있는데, 사실 ‘모든 기독교'의 문제긴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미 다 이루셨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는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도 ‘자발적으로’ 짊어매야 합니다.



이건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것인데 용기가 더욱 자라날수록 더 많은 ‘재앙’을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두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영'이 그 용기만큼 우리에게 ‘힘’을 준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가 ‘용기’를 가지면 '무언가'가 함께하여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든 ‘심리학'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실제 임상적 사례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마주하고 직면할 때 더 강해집니다. 거기에는 진정으로 신이 정한 ‘한계'외엔 막을 게 없습니다.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게 아닐 수가 없어요.


A : 맞아요, 가끔 ‘큰 시련'을 극복해 낸 사람들은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죠.


*인터뷰어는 피터슨 교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의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세 번 정도 계속 돌려보았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심리학적 상징체계로 다루어 왔지만, 그 복잡하고 내면적인 싸움 끝에 신은 실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존재론적으로 실재한다는 고백으로 나아갔다.


이런 그의 여정은 단지 "이성적 결론"이 아닌, 존재 전체로 씨름한 끝에 도달한 무릎 꿇음이다.


피터슨 교수는 이성과 심리학, 신화와 철학이라는 도구로 하나님과 씨름했다.


지금은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왜 자신의 여정이 결국 이 자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1세기에 참으로 필요한 지성인이다. 지식과 이성,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그의 여정은 단순한 논리의 결과물이 아니라 고통과 진심이 깃든 씨름의 기록이다.


그의 고백은 단지 한 사람의 회심 이야기를 넘어, 여전히 진리를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불빛이 되어주고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성적인 사고 끝에도 신앙은 가능하다”는 살아 있는 증거처럼 다가온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한국에서도 꽤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20~40대 남성층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고 공감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나는 왜 때문에.....)

아무튼 이런 좋은 대화를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어메이징그레이스네..


https://youtu.be/HsCp5LG_zNE?si=_pv--MRU3JD00YU5


이제 운동가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