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멜리데 - 오페드루소 33.4km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열이 나서 잠에서 깼다. 어제부터 계속 앓던 몸은 밤새 열이 끓고 있었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 땐 추웠는데 자다 보니 열을 내며 괜찮아진 건지,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전날보다 훨씬 나아졌다. 여전히 기운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캐나다에서 온 친구, 아이다에게 연락이 왔다. 이 마을에 묵는다고 했다.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는데, 내가 아파서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아이다는 약을 갖다 주겠다며 알베르게까지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약이 있다며 괜찮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다는 내 상태를 계속 걱정해 주었고, 오늘 컨디션을 보고 함께 걷자고 했다.
나는 아이다에게 오늘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고, 지금은 아이다와 함께 걷고 있다. 건강할 때는 혼자 걷는 것이 익숙했기에 이런 감정을 잘 몰랐지만, 힘들 때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아이다가 오늘 곁에서 함께 걸어줘서 너무 고맙다.
갈림길이 나와서 어디로 갈지 정하고 있다.
날씨가 흐려도 너무 흐리다.
돌다리 건너는 아이다
숲 속을 벗어나니 진-한 핑크 하늘이 나왔다.
아름답다.
걷다 보니 쉴 타이밍이 되어 카페에 왔다.
꼴이 말이 아니다.
아이다는 간식을 먹었다.
나는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기력이 없어서 오늘은 바나나 반 개만 야금야금 먹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다는 전 마을에서 헤어지고 나는 한 마을 더 앞으로 간다.
오늘 몸 컨디션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알베르게 예약을 하지 않았다. 이 알베르게는 이미 다 찼다고 해서 패스
음식점을 지나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난다.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배가 너무 고프다.
오 페드루소(O Pedrouzo)
산티아고 전 마지막 큰 마을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마지막 구간을 걷는다. 숲길과 시골 풍경이 어우러져 있어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걷기에 좋다.
다행히 내가 도착한 알베르게에 2층 침대 한 자리가 남아서 체크인했다.
몸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마트 가는 중.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알베르게에서 우산 하나를 빌렸다.
샐러드와 이온음료 등 간단하게 샀다.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먹었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침대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아직 싱숭생숭하다. 순례길이 하루 밖에 안 남았다니
이탈리아 친구, 마르티나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어제 내가 아팠을 때 같은 숙소에 묵었던 친구였다. 나는 너무 아파서 정신도 없었고, 나를 도와줬던 영국인 친구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잠든 사이, 다른 순례자들 사이에 내가 아팠다는 이야기가 퍼졌나 보다. 마르티나는 다가와 "몸은 좀 괜찮아졌어?" 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더니 약이 하나 있다며, 혹시 필요하냐고 내민다. 장을 활성화시켜 주는 유산균이 들어간 약이라고 했는데, 나에게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고마워, 괜찮아"라고만 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렇게 따뜻한 관심과 진심 어린 걱정을 받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덕분에 마음 한켠을 환히 더 밝혀주는 순례길이다.
드디어 내일 도착이다.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