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전화가 온다. 상담소를 운영하는 사모님이 내담자 한 사람이 못 온다면서 점심을 먹자고. 약속을 잡는다. 상담실 맞은편 우체국 직원 식당에서 수요일이면 수제비가 떠오른다.
딸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상담을 하는 분에게 조언을 구하면 되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가 자살 시도를 하고, 자해를 해서 119차를 타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염려했던 일들이 파장을 알 수 없이 퍼져나가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난 뒤 식당에 간다. 수제비 한 그릇과 봄이 묻어나는 겉절이들이 향기를 피워낸다.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던 멸치 떼와, 나무인가 풀인가 바다 땅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하늘거리던 다시마가, 끓는 물에서 노닌다. 수제비는 국물 맛이다. 미역이 새파랗게 기지개를 켜면서 살아난다. 은근하고 깊은 맛을 준 멸치와 다시마가 자리를 비키는 것과 달리, 미역은 마지막까지 너울거린다.
친구 엄마가 전화해서 울더라고 어쩔 줄 몰라하던 딸이. 친구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면서 낙담하는 것이 마음에 짠하다. 자기 삶만으로도 벅찬 이십 대인데 같이 사는 친구 때문에 마음을 닫을까 봐서 걱정이다. 선의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더 큰 잘못으로 번지지는 않을까 하고.
수제비의 주인공은 뭐라 뭐라 해도 밀떡이다. 얇을수록 쫀득거리며 입에 감기는 식감에, 간이 적당히 밴 것을 조곤조곤 씹노라면 국물과 어우러져 미각세포들이 깨어난다. 밀떡은 앞날 반죽을 해놔야 한다. 잘 치대서 봉지에 넣은 후 춥고 깜깜한 냉장고에서 숨을 죽여 하루정도 고난의 시간이 지나야 숙성이 된다. 얇게 늘어난 피가 손에 붙지도, 다른 것과 섞이지 않기를 고집한다. 갖가지 모양들이 김이 피어나는 냄비 속으로 미끄럼을 탄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면서 거품목욕을 마치면. 한 끼의 넉넉한 인심이 된다.
비 오는 날 한가로이 수제비 한 그릇과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 있게 그간의 안부와 알록달록한 이야기만 나누면 좋을 텐데. 딸의 친구가 일을 터트려 관심을 끌고 잘잘못들을 묻어버리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호의를 이용했다면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다 보면 더 아파해야 할 수도 있다고. 바다를 풀어낸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듯이 잘못된 부분들을 걷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걸까.
딸이 대학교 입학 날짜는 잡혔는데 숙소가 정해지지 않았었다. 지원한 기숙사가 되지 않자 고시원으로 보내야 할까. 지인에게로 부탁해야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물때에 아들이 서울 주택도시공사에 대학생 임대가 있다며 서류를 넣어보라고 했다. 순서를 기다려 집을 당첨받는 날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새벽부터 기다린 학생들의 줄은 끝이 없고. 물량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고 자기는 늦은 번호여서 가능성이 없다고 어떻게 하느냐고. 끝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마감 시간이 지나고 몇 명이서 허탈하게 그냥 앉아 있자, 담당자들이 불러서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단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주소와 연락처를 남기고 가라면서 물권이 나오면 연락해 준다고.
삼월이 가까워 오는 날. 에스 에이치에서 전화가 오고 지도에서 살 곳을 찾아 신청을 했다. 입학식 날 딸은 학교로 나는 집 계약을 하러 갔었다. 직원에게서 현관과 집 번호를 받고 들어가 청소를 했다. 필요한 것들을 사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던 딸이다.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친구와도 잘 맞는다며 좋아하더니. 여러 난감한 일들을 지혜롭게 헤쳐 나간다면 인생의 깊이를 한 자 늘일 수 있을까.
결국 친구가 이사를 갔다.
바다가 담겨있는 국물에 꽃처럼 피어난 떡과, 파릇한 이파리가 된 미역. 흙에서 나고 자란 애호박과 감자가 고명이 되고 매운 고추 한 개의 칼칼함이 마지막 부점을 찍는다. 무엇 하나라도 빠지면 밍밍하다. 수제비 한 그릇에 바다와 땅이 고스란히 스며들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조금씩 녹아들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