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기다림의 차이는 무엇이 다른가
지난여름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때 받은 명함의 선명함을 기억한다. 시민정원사로 봉사를 하다 만난 분이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니 한 번 오라던. 언젠가 지켜야 할 약속이 생긴 것 같았다. 한 뼘도 안 되는 종이가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던 순간. 그곳에서 나누었던 몇 마디의 말이 흩어졌다가 모이는 시간이 일 년이 다 되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흔하디 흔하게 섞는 약속처럼 친구들과 함께 가겠다고 말했었다. 자연스러운 발길로 닿아져 머물게 될 때를 기다리다 보니 돌이 거반 되었다.
신록이 우거진 오월이거나 단풍이 하늘을 가릴 만큼 다른 계절로 성큼 들어서면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성에서 만난다. 오래된 약속처럼 성 한 바퀴를 돌면서 여유 있게 거닐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일상의 보석처럼 알알이 박히는 때다. 약방의 감초처럼 박물관에도 들른다. 어느 때부터인가 먼먼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사진으로 글자로 전해진다. 과거의 시간들이 영상으로 살아나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초상화들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수려함이 어느 시대 거나 외모를 따졌나 싶다. 그런가 하면 <<새미록>>처럼 임진왜란의 말 못 할 이야기들도 그늘처럼 숨겨져 망을 보고 있다. 박물관엔 늘 행사가 열린다. 새로운 이야기처럼 각색을 해야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것이리라. 뭔가 색다른 역사의 뒤 안의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싶어 알면서도 혹해본다. 지난해에 들렀을 적에 다리 쉼을 할 수 있던 휴게실을 흘끔거렸지만 격자창만 고요하다. 작은 꽃병에 꽂혔던 꽃의 향기와 떡과 차 한 잔의 여유를 추억으로만 건네받는다.
신호등을 보고 건너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갤러리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당연히 그림이 우리를 내어다 보리라 생각했다. 주인의 그림솜씨를 볼 수 있겠거니 기대하면서. 기대는 늘 빛이 바라기도 한다. 흑백 사진만이 벽과 한 몸을 이루었다. ‘풀 땅: 살아있는 소멸’이라는 주제로 이철호 작가님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속의 풍경들은 힘을 잃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릴 대로 흔들리는 풀 대궁들이다. 빛깔을 빼앗겨버리고 초록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인가와 가까운 곳마저 어떻게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 먼 들녘도 잡초 더미로 바래는 촌의 모습이다. 집들과 가까운 땅들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신음을 뱉는듯하다. 풀 대궁 같은 시간을 견디는 어르신들만 살아가는 농촌의 모습은 아닌지 되짚어 본다.
작가에게 물었다. 주제가 무엇이냐고. 소멸이라 했다. 나는 기다림 같다고 했다. 소멸과 기다림의 차이는 무엇이 다른가. 작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주제는 달라질 수 있다고. 작가는 우리나라의 똑같은 지명을 가진 곳마다 찾아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을 일일이 사진에 담았다. 자신의 세계를 찾아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듯 작품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들녘에 놓인 마른 들풀들에 생명이 주어졌다. 나는 언젠가 농부가 나타나 알곡으로 가득한 들판을 가꿔 주기를 바라는 기다림을 그리움이라고 상상했다. 작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살폈으리라.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른풀들을 흑백으로 담아내어 소멸을 마주한 것이다.
몇십 년 뒷면 시골동네에 동남아에서 시집온 여인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나이차이가 많은 남편과 살다 여의고 자식들은 객지로 나가 홀로 남아 있을 사람들. 그 시간이 가까워 오는지 모른다. 어쩌면 벌써 와버린. 농사는 혼자 할 수 없기에 버려진 땅에 풀들만이 우쭉우쭉 자란다. 돌보아 줄 손길을 놓아버린 땅에 바람만이 휑할 것이다. 대안은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에이아이가 우리의 손발이 되어주고 우주선을 띄우고 우주로 날아가는 시대인데 한쪽은 또 허물어져 간다. 그래도 소멸을 말하기보다는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남겨놓으면 안 되겠느냐고 속 물음을 해본다.
*위 사진은 이철호 사진작가의 사진임을 밝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