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한 모퉁이 장독대에는 어머니의 세월이 녹아있다. 그 앞에 졸졸 이 피어있는 맨드라미의 볏은 유난히 붉다. 언니들이 짓찧어 손톱에 물들여주던 봉숭아는 아직도 난쟁이다. 부모님 떠나신 뒤에 덩그렇게 남겨진 집 울에는 꽃들만 서성인다.
낳자마자 윗목에 눕혀져 있던 갓난쟁이는 젖배를 골아 입만 달짝 달짝. 동네 아지매가 그럼 안 된다고 목숨은 하늘이 준 것이라며, 미음을 쒀서 입에 흘려주었다. 살그니 살아난 아기는 형제들보다 키가 작다. 딸을 그만 낳으라고 이름을 말예라 지었다. 거짓말처럼 아들들이 태어났다. 터 잘 팔았다고 할머니한테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마루에 앉아 장독대를 바라보며 “어머니 항아리 한 개 주이소” “마음에 든 것으로 골라가” 중간 크기의 동그만 옹기그릇. 어려운 살림에 한 개씩 늘려갔을 배불뚝이들. 흔적을 가지고 싶었다. 어머니와 이어진 탯줄처럼 남아있는 기억의 끈. 몸인 양 살며시 기댄다. 남들은 가락지나 목걸이를 가져와서 기념을 한다더니. 손에 끼워져 있던 동그라미는 어디서 어머니를 불러내고 있을까.
항아리는 바닥이 반듯하지 않고 기울어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다. 어느 날 만난 친구에게 “왜 어무이는 항아리를 뒤뚱거리는 것으로 샀을까.” “아이고. 돈이 없어서 그런기라.”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딸 다섯과 아들 둘을 건사하느라 허리가 휘었을 어머니의 장독에는 바로 서지 못하는 항아리들이 한 해 두 해 하나씩 장을 담고 된장을 품고 눈처럼 하얀 소금 꽃을 피워냈다.
오월이 되면 노란 감꽃이 별처럼 피어났다. 감나무는 역부러 감꽃을 수북이 떨어뜨려준다. 무명실에 꿰어 꽃목걸이를 만들고, 소꿉놀이 꽃 밥이 되도록 인심이 넉넉했다. 이제는 고목이 되어 꽃잎 몇 개 머금을 뿐. 주인 잃은 빈 장독대를 지키며 세월을 건넌다.
그리움은 막무가내로 피어난다. 뭉게구름처럼, 뜨물같이 텁텁하게 마음을 적시어 오는 그 무엇일까. 자식들이 커서 소나무처럼 의젓하고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머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린다. 항아리를 보면서 가만히 어머니를 불러본다. 다섯 번째도 딸이라고, 외면해야 했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딸 둘 낳으면서 이해했다. 유난히 아들 손주를 밝히는 시부모님의 성화에 몸서리가 쳐지고, 신혼시절의 꽃은 빨리 지는 듯했다. 셋째로 아들을 안았을 때는 세상 다 가진 듯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어머니의 아들을 낳지 못할 때의 심정은, 돌덩이 하나 가슴에 올려놓았지 않았을까. 시어머니의 말없는 지청구는 손가락질보다 더한 비수처럼 마음에 와 박혀 베이곤 했을지도. 막내딸을 외면해야 했던 순간을 미안함으로 사셨을 어머니. 이제 온 마음으로 용서한다. 부모 자식으로 만나 서로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
어머니가 그립다. 항아리를 닦고 또 닦는다. 뚜껑은 머리인 듯 쓰다듬고, 불뚝한 곳은 주글주글한 배 인양 어루만진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항아리라도 가져다 놓지 않았으면 무엇으로 어머니를 추억했을까. 그리움만 절절히 피워냈을까. 어머니의 숨결이 녹아있는, 뭐라도 더 먹이려 애썼던 흔적은 항아리로 동그마니 앉아있다. 생그레하다. 같이 있어서 좋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그득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