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즘 단어의 기원은 프랑스 남부 지방 마르세이유에 지어진 르꼬르뷔지에의 집합 주택에 사용된 거친 콘크리트를 뜻하는 [béton brut]에서 [브루]라는 표현을 빌어 왔다. 이 렇듯 직접적인 기원은 르꼬르뷔지에의 주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작품의 전집에서 비 롯됐다고 보인다. 르꼬르뷔지에는 이미 1923년 저서 [건축을 향하여]에서 이 단어를 인용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전적인 건축과 현대기술의 조화에 감탄하며 “건축은 거친 재료들(Materiaux bruts)과 함께 감동스러운 결과물을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이 언급에서 알 수 있듯 ‘거친 재료’를 뜻하는 단어들에서 브루탈리즘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원 에서 비롯되는 재료의 담론은 가장 초기건물인 파리 서부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 위치한 maisons jaoul(1955)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지중해 특유의 지역적인 지붕구조에 서 영감을 받은 이 주택은 입면에서 보이듯 벽돌 사이사이 조인트 역할의 시멘트와 콘크 리트 슬래브를 그대로 노출하는 등 재료의 원시적인 배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유럽의 브루탈리즘은 전쟁과 종전이라는 역사적 키워드와 함께 떠오른다. 브루탈리즘에서 사용되는 콘크리트는 건축에서 가장 먼저 중요시되는 경제성과 내구성, 시공과정의 용이 함, 그리고 과감한 조형을 가능하게 하는 미학적 특징 등을 가진다. 그렇기에 종전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지속적인 주거공간 부족 문제와 파괴된 도시의 재건과 복구 등 정부가 추진 중인 여러 신도시 계획 등에 대해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건축적 대안으로 선택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점차 국제적 양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브루탈리즘은 국가와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명확한 공통적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거대한 스케일의 과감한 기하학적 형태, 둘째 중력에 저항하는 듯한 과장된 켄틸레버, 셋째 구조재의 과감한 노출 등이 있다. 그 중 세 번째의 특징은 스미슨 부부(Alison & Peter Smithson)가 이끄는 뉴브루탈리즘 (New+brutalism)의 중요한 기반으로 이어진다. [as found : 발견대로]라는 재료마감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브루탈리즘은 건축물이 지 닌 특별한 용도를 나타내는 구조체는 물론 재료 본연의 마감을 건축의 입면에서 과감히 드러낸다. 이 부분을 레이너 반함(Reyner Bamham)은 건축양식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미학 적 측면으로 정의했지만 스미스 부부는 재료 표현의 솔직함, 건축이 가져야 하는 윤리적 태도로 정의했다. 하지만 뉴브루탈리즘이라는 명칭으로만 보았을 때는 기존 브루탈리즘과 의 차별성이 느껴지지만 스웨덴의 19세기 건축양식으로 복위하는 경향을 위해 만들어진 신 제국주의(new -emprism)처럼 신브루탈리즘 역시 일종의 기존의 것의 모방이라고 해석 된다. 이러한 모방적 시도는 브루탈리즘 특유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 구조의 명쾌한 노출, 재료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통해 하나의 건축양식으로 자리 잡는 새로운 측면 으로 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기준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 새로운 논제 가 떠오른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부정적 여론은 현대에 브루탈리즘이라는 단어가 쉽게 사용되는 가벼움에 비해 투박하고 육중한 콘크리트처럼 일반적인 시선의 아름다움과 거 리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흉물로써 바라본 브루탈리즘은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냉전 시대의 방공호를 연상시킴으로써 긴장감과 공포를 유발한다는 비난을 형성한다. 가장 큰 특점으로 작용되었던 거친 콘크리트는 특유의 탁한 잿빛과 거대한 스케일감이 더해져 침 울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면적인 정서와 더불어 재료 특유의 성질이 가진 부식, 노화, 파쇄 등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정서도 함께 연관된다. 이렇게 고착되어 온 이미지는 현대시대에 디스토피아적 대표 요소로써 황폐화된 미래도시사회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한편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다뤄봤을 때에는 단순 콘크리트 덩어리로 치부할 수 없는 문화적 유산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함께 떠오른 다. 이처럼 [브루탈리즘은 아름다운가, 혹은 철거대상의 흉물인가?]와 같은 상충되는 질문에 대해 여전히 극명한 이견들이 존재하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이러한 현대와 전근대, 비 유적이거나 추상적, 개인과 집단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창조적이고 공간적인 예술 로써 건축적 표현의 창조로 이끄는 과정이지 않을까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