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저는 영화 보고, 책을 보고 뭘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작가는 무슨 의도를 전달하려 했는지, 여기서 이건 뭘 의미하는지, 어떤 걸 상징하는지. 찾으려 노력해도 그런 걸 잘 찾지도 못하고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거든요. 수능 때 유독 언어점수가 낮았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그랬나봅니다.
근데 이 영화를 보고는 너무나 궁금해졌어요. 베이글은 뭘 의미하는 걸까? 내가 생각한 게 맞을까? 나는 영화를 보고 너무나도 벅찬 생각에 잠겼는데, 이 작품의 제작자도 이런 생각을 하길 바랐던 걸까?
많은 영상이나 평론에서, 이런 영화나 작품에 결론을 내곤 하잖아요. 이 영화에 대한 콘텐츠들을 보다 보니 거의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듯했어요. 그 결론은 정말 심플하고 수도 없이 들은 말인데, 이제야 이해가 돼요. 이 영화 정말 잘 본 것 같아요.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게 돼요. 그로 인해 인생은 0.01도만큼 바뀔 수도, 180도 바뀔 수도 있어요. 느긋한 성격 탓에 “다음 거 타지 뭐”하고 보내버린 지하철에서 추돌사고가 나버릴 수도 있고, 술김에 보낸 고백으로 시작한 연애가 결혼까지 이어질 수도 있잖아요. 엄청난 선택을 한 줄 알았는데 딱히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다 시작한 무언가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압도될 만큼 많은 경우의 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중에, 가장 안 좋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볼게요. 아마 태어날 때부터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마 내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부터 시작할 거예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상상이 현실이 된 거예요. 익살스러운 행동 하나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대요. 심지어 그 기억과 경험이 공유까지 되고요. 그렇게 더 나아지면 기분이 어떨까요? 제 삶은 원하는 삶으로 좁혀질까요?
영화는 그러한 인생은 허무할 수 있다고 조언해요. 그 선택들의 결과물인 “나”들을 모두 만나고 온 사람이 등장하거든요. 나는 담백한 플레인 베이글이었는데, 맛있어 보이는 참깨도 올리고, 크림치즈도 올리고 크렌베리도 올리고. 존재하는 맛있는 거 다 올려보니까 담백했던 나는 온대 간데 없어져 버린 거예요. 참 부질없죠?
그때 그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텐데 하고 한탄만 하다가 실제로 그 사람들을 만나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고 한 군데에 합쳐보니까 세상 멋있고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통계적 필연성이라는 용어로 이 상황을 설명하시는 분의 영상을 봤어요. 그렇게 될 경우 중 그냥 하나일 뿐이다. 너도, 나도.
이것저것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확인해 봐도 별게 없고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해 다 놓아버리려고 한 순간, 그 삶을 지탱해 준 건 결국 지금 이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소소한 행동들이었어요. 옛 부인의 향수 냄새, 서로 좋아했지만 표현을 안 하던 사람 간의 만남 같은 것들이요. 이것들은 부질없지 않아요. 놓아버리고 싶은 삶을 지탱할 만큼 영향력이 강하거든요.
결국 이 거대한 문제를 만든 건 최고의 에블린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해서 우주를 구한 건 최악의 에블린과 최악의 웨이먼드였잖아요? 사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영화적인 우연이겠죠? 다만 허무주의에 현혹되어 흑화 한 에블린이 만난 사람들의 이 순간에 대한 진심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최악의 삶을 살고 있었다 보니 더더욱 빨리 깨달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돌이 된 서로가 티격태격 말을 하다가 돌덩이 조이가 이제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굴러 떨어져요. 돌덩이 에블린은 거친 비탈길을 잠시 보더니 함께 굴러 떨어지거든요. 비슷한 은유를 담은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돌덩이라는 아무리 하찮은 생이라도, 이 순간에 힘이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 중 하나니까요.
그 모든 곳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 이동진
잘 나가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순간들, 그리고 그 반대에 놓여있던 선택받지 못한 선택들. 그로 인해 갈라져버린 “나”들. 설령 다중우주이론이 터무니없는 거짓이고 유머거리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 번쯤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때 내가 재수를 안 하고 서울로 대학을 갔더라면, 장교지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생각 안 하고 안정적으로 대기업에 갔더라면. 지금 내 인생은 아마 많이 달라졌겠지?
물론 중요해요. 그때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다가올 선택에 신중하게 생각하니까요. 다만 저와 이 영화는 그 선택, 시간이 지나면 하지 못하니 최대한 시간을 쪼개서 다 해봐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의 너와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해라. 그리고 행복해라! 그 어쩌면 들을 모두 모아도 지금 이 순간과 바꿀 수 없어요. 그 순간이 돌이 돼버린 나라던지 손가락이 소시지인 나라더라도요.
영화가 끝나고 에필로그가 나와요. 재개봉 확장판에서만 보여준다고 하더라고요. 10분짜리 유튜브 같은 그 영상엔 이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재밌게 그 순간을 즐기는지를 보여줬어요.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그 영상이 이 영화의 마침표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인생이라는 게 그냥 웃고 떠들고 즐기면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니까 우리가 이 말을 그렇게 진중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다만 딱 그만큼의 무게로, 즐기고 웃고 떠들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이 영화 한 편이 나를 180도 바꿔버리진 않을 거예요. 다시 아등바등 현생의 바다로 헤엄치러 몸을 내던질 거고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손짓과 발짓을 하겠지만요. 가끔은 내 옆의 물고기도 보고, 가라앉아도 보고, 밑으로도 헤엄쳐 보려고요.
Copyright © HOJUN I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