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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Aug 22. 2023

파워 J의 무계획 여행

베트남 여행기 1. Que sera sera

 제 브런치의 최다 조회수를 기록중인 글은 작년에 다녀온 스페인 여행의 계획문서를 설명하는 글, 여행을 계획하기 입니다. 일정, 할 일, 예산, 숙소, 짐 체크리스트 등등 최대한 계획해서 방만한 내 본능을 잠재우자는게 핵심인 글이죠. 저 템플릿을 만들고, 실제 여행에 사용해본 다음 글을 정리하면서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내 손아귀에 다 들어온 것 같았거든요.

이전에 작성했던 여행 계획 문서들

공항에 가거나 여행지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를 여행의 시작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을 작성하고 이것저것 예약하고 알아보는게 마치 미니게임 혹은 코너 속 작은 코너처럼 나만의 유희거든요. 와이파이가 안될 때를 고려한 몇몇 주요 지도 사진 및 노래 플레이리스트까지 만들면 들뜬 마음이 배가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보름짜리 베트남 여행의 계획은 무계획입니다. 예약한건 비행기 티켓과 첫 숙소 뿐이에요. 어디서 얼마나 묵을지는 가서 결정하기로 했고, 돈을 얼마나 쓸지도 안정했으며, 짐도 하루 전날 호로록 싸고 출발했습니다.


사실 출발 전에는 약간 두려움이 몰려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너무 괜찮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무계획 속 원칙   


그렇다고 그냥 뇌를 비우고 다닌건 아닙니다. 계획이 없는 대신, 저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커피, 맥주를 최대한 많이 마신다.

하루 1만보 걷는다

 10권 읽는다.


 원칙은 아주 간단하고 실현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원칙을 정하고 싶었는데, 커피와 맥주는 몇잔씩 정해놓기가 애매해서 그냥 최대한 많이로 했습니다.


 이렇게 정하고나서 여행 출발하는 날 아래와 같이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습니다. 일종의 떠벌림 효과에요. 1만보 걷기나 책 10권 읽기는 어느정도 인증이 가능한 요소니까요. 정말로 저건 지킨다, 그대신 자유롭게 여행한다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친구들에게 확인받는다 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돈이 해결해준다면

 무계획 여행에서 돈이 갖는 힘은 대단했습니다. 돈의 색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내 생각과 다르게 삶이 흘러갈 때, 즉 여행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해결책을 찾느라 급급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할 때가 있는데 그 문제를 돈이 해결해준다면, 그리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빠르게 소비한다면 그건 정말 저렴하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번 여행 중 갑자기 아이패드 충전이 안되서 빠르게 매장으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샀고, 도시가 맘에들어 하룻밤 더 보내기 위해 취소가 안되는 버스티켓을 버리고 호텔 리셉션으로 내려가서 현금으로 하루를 연장했습니다. 


더이상 계획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하고 의사결정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여행자의 시간, 마음씀 여행지에서 더더욱 가치있습니다. 마냥 조금이라도 돈 안들게 해결해보려고, 계획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심적으로나 시간으로 보나 합리적입니다. 


계획의 양면

 계획대로 살게된 ’나‘는 어쩌면 ’이상향 속 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상향 속 나’는 마치 SNS에 비친 잘나가는 아이들을 보는 우리들처럼 나를 존재하지도 않는 잘나가는 나와 비교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계획에 강박이 생기고, 안지키거나 틀어졌을 때 불안함을 느낍니다.

반면 당장 다음 순간에 뭘 해야할지, 그 일을 할 때 필요한건 뭔지를 미리 알고 준비한다는 관점에서 계획은 꽤 높은 확률로 실패하지 않게 해줍니다. 매 순간마다 그 때 가진 정보로만 대응한다면 미리 준비한 사람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죠.


 이에 대한 의견도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배움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분석해서 빈틈없이 계획하라는 사람도 있고, 당장 5분뒤도 알 수 없는 세상을 무슨 수로 계획하느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칙이 주는 힘

처음에 세운 원칙은 여행 내내 저에게 경각심을 심어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힘들 땐 무뎌지기도 했지만 여행의 중반을 넘어가며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이 얼마나 되나, 1만보를 못걸은 날이 있나 같은 기준들을 평가해보며 목표치를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번은 질릴만큼 마셨고, 2번은 완벽하게 달성했으며, 3번은 1권 모자르게 읽었지만 거의 근소한 차이로 미달성한 것이라 아주 만족합니다. 추후에 다시 다뤄보기로 해요.


마치며

다음에도 이렇게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부모님 모시고 관광을 가거나, 너무 궁금한 여행지의 투어를 계획한다면 혹은 돈이 많이 드는 여행지를 여행할 때는 다시 특급 계획형 인간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근데 이번 여행처럼 머리를 식히는 특수한 목적의 여행을 다시 간다면, 저는 저 위에 올린 계획보다도 짧은 계획을 세우고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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