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 1. Que sera sera
제 브런치의 최다 조회수를 기록중인 글은 작년에 다녀온 스페인 여행의 계획문서를 설명하는 글, 여행을 계획하기 입니다. 일정, 할 일, 예산, 숙소, 짐 체크리스트 등등 최대한 계획해서 방만한 내 본능을 잠재우자는게 핵심인 글이죠. 저 템플릿을 만들고, 실제 여행에 사용해본 다음 글을 정리하면서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내 손아귀에 다 들어온 것 같았거든요.
공항에 가거나 여행지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를 여행의 시작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을 작성하고 이것저것 예약하고 알아보는게 마치 미니게임 혹은 코너 속 작은 코너처럼 나만의 유희거든요. 와이파이가 안될 때를 고려한 몇몇 주요 지도 사진 및 노래 플레이리스트까지 만들면 들뜬 마음이 배가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보름짜리 베트남 여행의 계획은 무계획입니다. 예약한건 비행기 티켓과 첫 숙소 뿐이에요. 어디서 얼마나 묵을지는 가서 결정하기로 했고, 돈을 얼마나 쓸지도 안정했으며, 짐도 하루 전날 호로록 싸고 출발했습니다.
사실 출발 전에는 약간 두려움이 몰려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너무 괜찮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냥 뇌를 비우고 다닌건 아닙니다. 계획이 없는 대신, 저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커피, 맥주를 최대한 많이 마신다.
하루 1만보 걷는다
책 10권 읽는다.
원칙은 아주 간단하고 실현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원칙을 정하고 싶었는데, 커피와 맥주는 몇잔씩 정해놓기가 애매해서 그냥 최대한 많이로 했습니다.
이렇게 정하고나서 여행 출발하는 날 아래와 같이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습니다. 일종의 떠벌림 효과에요. 1만보 걷기나 책 10권 읽기는 어느정도 인증이 가능한 요소니까요. 정말로 저건 지킨다, 그대신 자유롭게 여행한다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친구들에게 확인받는다 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무계획 여행에서 돈이 갖는 힘은 대단했습니다. 돈의 색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내 생각과 다르게 삶이 흘러갈 때, 즉 여행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해결책을 찾느라 급급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할 때가 있는데 그 문제를 돈이 해결해준다면, 그리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빠르게 소비한다면 그건 정말 저렴하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번 여행 중 갑자기 아이패드 충전이 안되서 빠르게 매장으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샀고, 도시가 맘에들어 하룻밤 더 보내기 위해 취소가 안되는 버스티켓을 버리고 호텔 리셉션으로 내려가서 현금으로 하루를 연장했습니다.
더이상 계획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하고 의사결정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여행자의 시간, 마음씀 여행지에서 더더욱 가치있습니다. 마냥 조금이라도 돈 안들게 해결해보려고, 계획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심적으로나 시간으로 보나 합리적입니다.
계획대로 살게된 ’나‘는 어쩌면 ’이상향 속 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상향 속 나’는 마치 SNS에 비친 잘나가는 아이들을 보는 우리들처럼 나를 존재하지도 않는 잘나가는 나와 비교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계획에 강박이 생기고, 안지키거나 틀어졌을 때 불안함을 느낍니다.
반면 당장 다음 순간에 뭘 해야할지, 그 일을 할 때 필요한건 뭔지를 미리 알고 준비한다는 관점에서 계획은 꽤 높은 확률로 실패하지 않게 해줍니다. 매 순간마다 그 때 가진 정보로만 대응한다면 미리 준비한 사람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죠.
이에 대한 의견도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배움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분석해서 빈틈없이 계획하라는 사람도 있고, 당장 5분뒤도 알 수 없는 세상을 무슨 수로 계획하느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세운 원칙은 여행 내내 저에게 경각심을 심어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힘들 땐 무뎌지기도 했지만 여행의 중반을 넘어가며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이 얼마나 되나, 1만보를 못걸은 날이 있나 같은 기준들을 평가해보며 목표치를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번은 질릴만큼 마셨고, 2번은 완벽하게 달성했으며, 3번은 1권 모자르게 읽었지만 거의 근소한 차이로 미달성한 것이라 아주 만족합니다. 추후에 다시 다뤄보기로 해요.
다음에도 이렇게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부모님 모시고 관광을 가거나, 너무 궁금한 여행지의 투어를 계획한다면 혹은 돈이 많이 드는 여행지를 여행할 때는 다시 특급 계획형 인간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근데 이번 여행처럼 머리를 식히는 특수한 목적의 여행을 다시 간다면, 저는 저 위에 올린 계획보다도 짧은 계획을 세우고 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