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을 떠올리면 치즈를 사러 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스페인 여행을 갈 때, 덴마크 여행을 갈 때 왕복 비행기를 타면서 네 번 정도 들렀던 것 같은데 돌아올 때 꼭 치즈를 사 왔다. 손바닥보다 더 크고 둥그런 치즈 덩이는 맛에 따라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등의 포장지로 싸여 있었고, 집에 도착해서 부스럭 거리며 치즈 포장지를 뜯을 때의 설렘이 여행이 끝났다는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주곤 했다.
어린 시절 앨범에도 치즈를 너무 좋아한다는 엄마의 메모와 함께 코 위에 슬라이스 치즈를 묻히고 있는 사진이 있다. 어른이 되어 소위 ‘진짜 치즈’를 맛본 후에는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조각 집어들 때마다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한층 더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결혼한 우리는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첫 여행지는 바르셀로나였다. 신혼여행 계획표를 보고 친구가 이렇게 다니다가는 쓰러진다는 충고를 해줬는데 그때 말을 들을 것을 그랬다. 결혼식 날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하러 떠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결혼식을 마치고는 부랴부랴 공항으로 떠나 해가 저물어 갈 즈음 첫 끼니를 먹었다. 야밤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 도착한 바르셀로나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예약해 놓은 스냅 촬영이 위약금 없이 취소되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너무도 피곤한 탓에 예쁜 옷을 입고 활짝 웃을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캐리어에 피곤함을 얹고 겨우 호텔에 도착해 푹 자고 일어난 뒤 남편이 내게 건넨 상자 안에는 갖가지 종류의 치즈가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익숙한 치즈들이었지만 이름을 아는 것은 브리 치즈밖에 없었다. 아무튼 두툼한 두께의 브리 치즈와 슬라이스한 치즈, 정육면체 모양으로 잘린 치즈 등등이 먹음직스러웠다. 호텔 내의 레스토랑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구매해 왔다고 했다. 짭짤한 치즈는 함께 포장된 프렌치프라이, 프로슈토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치즈가 ‘여행의 맛’이 된 것은 신혼여행보다 훨씬 더 역사가 오래됐다. 여행지 코스에 포함되지는 않더라도 여행의 설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있는데 공항과 비행기가 그렇고, 호텔 조식이 그렇다. 그리고 조식 메뉴 중에서도 ‘내가 해외여행을 왔다!’고 실감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 바로 치즈였다. 평소에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종류의 치즈들이 플레이팅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여행의 설렘이 불쑥 마음을 뒤흔든다. 겉은 쫄깃하면서 안은 부드러운 까망베르 치즈의 맛, 커다란 치즈를 얼마나 잘라 먹을까 고민하는 맛, 갓 구운 빵의 냄새를 맡으며 끼워 먹을 치즈를 고를 때의 맛.
이렇게 치즈를 좋아하는데도 영역을 넓히다 보니 좋아하지 않는 치즈도 생겼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내가 신청한 밀 플랜에 따라 원하면 학교에서 닭가슴살 샐러드를 받아서 먹을 수 있었다. 그 샐러드 안에는 신선한 채소와 닭가슴살과 ‘블루 치즈’가 있었다. 늘 깔끔하게 가공된 치즈를 먹어서 그런가 그 전에는 치즈 ‘고린내’라는 말에 동의할 만한 냄새를 맡아보지 못했는데 비로소 공감할 만한 경험을 했다. 시각적으로도 영 곰팡이가 핀 것 같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기심에 몇 번 먹어 보았는데 이상하게 점점 적응을 하더니 한국에 돌아와서는 블루 치즈가 올라간 피자를 시켜서 꿀에 찍어 먹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즈음 되면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 조금 애매해졌다.
스키폴 공항에서 사 온 둥그런 치즈들은 그냥 썰어 먹어도 맛있었고, 와인을 한 병 사서 안주로 먹으면 웬만한 바(bar)가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특별한 맛이 첨가되지 않은 기본 치즈도 맛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후추(pepper)가 첨가된 치즈와 고추(chilli)가 첨가된 치즈였다. 페퍼 치즈는 약간 자극적으로 짭짤한 맛에 계속 손이 가고, 칠리 치즈는 계란말이에 썰어 넣어 먹으면 매콤한 맛과 치즈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서 맛을 한층 끌어올려 주었다.
최근에는 커피와 치즈가 궁합이 정말 잘 맞는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아침에 먹을 것이 치즈밖에 없어서 커피와 함께 먹어 보았더니 커피에서 굉장히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났다. 버터 커피를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매력과 비슷한가 보다 추측했다.
2020년 연초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고 비행기 티켓과 치즈 농장 체험 프로그램까지 예약했는데 그로부터 열흘 뒤 COVID-19가 발발했다. 금방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하며 6월까지 버텼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상황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떠나지 못했다. 가지 못한 여행을 아쉬워하며 스키폴 공항에서 치즈를 사던 기억을 떠올리기를 여러 번, 조금씩 하늘길이 열리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우리의 상황이 변해 당장 여행을 떠나기 어려워졌다. 언제 다시 스키폴 공항을 찾아 여행의 맛을 느끼며 치즈 덩이를 쥐어 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