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산문
여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항상 여름 한낮의 정오 안에서 볕은 나를 까맣게 그을려도 네 앞에 서면 부서져라 웃었으니까 이소낙이라는 필명은 이제 쓰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이소낙과 지금의 필명인 이안이 쓰는 게 아닌 문학을 전공하고, 동물을 키우고 피아노를 가끔 연주하는 내가 쓰는 이야기
우리는 제법 잘 어울렸던 것 같아 이것조차 미화시키는 것인가 싶지만 유독 흰 피부를 가진 너와 까만 피부를 가진 나는 서로가 건너편에 있는 것 같기도 했었지 기록되지 않은 사랑은 종종 미화되고, 너를 더 아름답게 만들겠지만 나는 문학을 하며 너를 서정으로 기록하고 우리는 너무 섣불러서 이미 아름다웠잖아 우리,
장마가 오면 비로소 여름이 온다고 대개 그러지만, 나는 네가 있어 항상 여름이었던 것만 같은 기분 유독 흰 옷을 자주 입었고 땀에 절여져 투명하게 변해버릴 때면 그게 마음이라는 듯이 우리는 투명한 마음을 지닌 채로 자주 한강의 테두리를 걷기도 했었지 가끔은 이런 여름이 멸종해 버리면 어떡하지 네가 사라져서 앞으로 여름이 안 오면 어떡하지 사뭇 이런 상상을 자주 하기도 했던 것인데, 그것은 불안이나 불완전한 미래를 멋대로 점지하는 나의 지병이라 어쩔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계절마다 가난을 달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봄에는 야앵(夜櫻)을 즐기러 여의도를 자주 찾았고 노점상들은 여러 먹거리와 돗자리를 대여해 주는데 그것조차 우리는 집에서 과일을 깎아가고 주변에서 종이상자를 가져와 깔고 앉아 서로 다정한 말을 해주었지
여름에는 장마가 지나면 시장에 가 철 지난 혹은 멍이 든 과일들을 사는 일에 몰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싸게 샀다며 좋아하는 너의 웃음을 보는 일이나 철 지난 당도 높은 과일이나 비슷한 면이 있기도 했지 그리고 동해에 가는 일도 잦았다 여름의 동해에서 우리는 아득히 하나의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끝으로 보이던 동해의 너머 앞에서 유난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는 일이 많았지 아마 그것은 이 세상이 멸종한다고 해도 우리의 앞에 있는 저 동해가 우리를 덮친다고 해도 그래서 우리가 잠겨 죽어도 놓지 않을 거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늘이 높았던 가을에는 강원도를 자주 찾았다 시험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일부러 늦게 대관령에 가서 여태 우리가 하늘에 쏘아 올린 마음이나 미래를 바라보는 일을 즐겨했다 하나씩 별을 이으면서 별자리를 만들고 엉터리 이름을 붙이는 일도 제법 좋아했다. 그러다가 유성우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소원을 비는 것보다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안에 떨어지는 유성우를 지켜보는 일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많았다
겨울에는 붕어빵을 잘도 사 먹었다. 지폐를 몇 장씩 가지고 다니는 일은 겨울의 습관인 것 같았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아도 귀로 빨갛게 물음표를 그리며 양 볼도 샛말갛게 붉어졌지 그건 아마 추운 겨울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고, 퍼지는 입김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눈이 내리면 우리는 하염없이 허물어져 온 세상이 하얘져 서로의 멍을 안아주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미암아 사계를 지나 여전히 이곳은 여름, 혹은 너의 이름 여름은 왜 이토록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지 그리고 장마의 한가운데에서는 숨어 우는 사람이 잦아 등을 토닥여주다가 같이 몰래 숨어 울게 되는지
일기장에는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이라고 문장을 적어놓고 가시지 않은 무더위에 장마가 장미로 오탈자가 번진다 무작정 너에게 가, ‘일기장에 장마가 장미가 되어버렸어 그래서 장미를 사 왔어, 줄기에 붙은 가시는 내가 안을게 너는 뭉그러진 아름다움만 가져가’라는 말은 제법 여름에만 할 수 있는 고백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나의 말에 너는 줄기에 붙은 가시를 떼어 내 코에 붙이고 배시시 웃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너는 여름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네가 사라진 여름은 네 이름만 오탈자처럼 번져가고 있는데 우리의 여름이 번져도 여전히 네 이름만 선명해진다
종종 우리가 다녀갔던 장소를 다시 한번 혼자 가보곤 한다 우리가 벚꽃을 보러 가던 한강의 테두리는 여전히 벚잎이 만개해 있었으며, 동해에 가서는 한참을 걷다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돌아왔는데 사랑이 모래성을 함께 쌓아 올리는 일이라면, 이별은 파도에 뒤엉켜 모래성은 흔적조차 남지 않아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대관령에서 밤하늘은 우리가 붙여주었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여전히 여름이 오면 나는 너를 생활한다 아직도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나는 너를 생활한다 가난을 달래는 방법이나 계절별로 제철인 방법을 찾는 너의 습관은 나의 생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비문으로나마 나타낼 수 없는 말, 대개 모두의 사랑이 그렇듯이
올해의 여름 안에서는 네가 얼마나 선명해질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나의 첫 번째 여름
너와 함께한 여름은 여름스러웠고, 여름스럽고, 여름스러웠을 것이 분명했다 여름, 여름, 발음하다 보면 어느새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꿈속에서도 미열을 앓다 보면 어느샌가 네가 나타나 이마를 짚어주었지 너도 꿈속에서 여름잠을 자며 미열을 앓았을까 궁금하지만, 그런 것은 여름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한 여름의 일들은 우리가 다듬었던 사랑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여름을 닮아 채도가 짙고 선명했던 마음을 이제는 여름에 기대어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장마가 오면 바깥에 걸어둘게
여름스럽게, 여름스럽고, 여름스러웠던 나의 영원한 여름인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