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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 진 Feb 19. 2016

렘브란트의 빛을 따라서



1편 이후 글이 좀 뜸했습니다. 제가 지난 월요일까지 기말 고사 기간이었기 때문인데요, 저는 지금 독일의 한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제로 기말고사를 마치고 이제 숨통이 좀 트여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삼십 대가 되어 다시 대학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어릴 때처럼 벼락치기를 하거나, 시간에 쫓기며 급히 텍스트를 읽거나 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는가 봅니다.



그럼,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지난 글에서 제가 렘브란트와 다 빈치의 작품을 비교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빛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렘브란트의 빛' 이라는 관용어는 이미 굉장히 유명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유달리 빛의 흐름이 눈에 띄기 때문이지요.


▲ The apostle Paul in prison 감옥의 사도바울


이 그림을 보면 어쩐지 사진 같지 않은가요? 저의 렘브란트에 대한 일감은 무엇보다도 '사진 같다' 였는데요, 여기서 '사진 같다'의 의미는 완벽하게 실제 사물을 재현해 내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그가 빛의 흐름을 쫓아서 그리고 그것을 끌어들여 그림을 그려낸 모습들에서 마치 창 밖에서 거대한 조명을 활용해서 빛을 안으로 쏘고, 사도 바울을 연기하는 한 사내가 실내 세트장에서 어떤 연극의 포스터 촬영하듯 빛을 아주 멋지게 사용한 사진 같다는 의미 입니다. 

그는 빛과 색을 잘 활용하였고 어떤 색으로 어떤 빛을 표현해서 그림을 극적으로 만들지 잘 아는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 The anan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니콜라스 톨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그룹 초상화 인데요, 그를 최고의 초상화가로 입지를 다지게 해주었지요. 그가 살던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사 조합이 주문한 이 그룹 초상화에서 그는 다른 평범한 그룹 초상화처럼 모델을 화면에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각도로 인물의 얼굴을 배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대체 빛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정확히 알아채기 힘들지만, 스스로 빛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가운데 시신과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오른쪽 톨프 박사의 두 손이 가장 눈에 띄는데요, 이는 인물 묘사보다는 해부학 강의라는 행위 자체가 렘브란트에게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이렇게 감각적인 그룹 초상화 혹은 단체 사진을 접하기는 쉽지 않지요.


▲ The Nightwatch, 야경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인기에 끝이 다가오게 되는데요, 위의 작품이 완성된 것을 본 그의 후원자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값을 똑같이 나누어 금액을 지불 하기로 했는데, 누구는 전경에서 또렷하게 보이고 누구는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거죠. 기분이 상한 그들은 돈을 지불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후 렘브란트에게 단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마음을 뒤로 하고 이 작품을 보자면, 빛이 굉장히 감각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이 넘치고요. 


이 작품에 대한 추후 슬픈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원래는 반닝 코크 대장이 거느린 장교들의 단체 초상화를 민병대가 출병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그린 것인데, 전시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크다고 하여 화가의 동의도 없이 군인들이 그림의 일부를 잘라서 버렸고요, 그림이 전시된 방의 난로의 연기로 인하여 두꺼운 검댕이 덮여서 이 그림이 야경(야간 순찰)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대낮을 배경으로 그렸다고 하네요.



▲ The Slaughtered Ox, 도살된 황소


마지막 그림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도살된 황소의 그림입니다. 제가 렘브란트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그림인데요, 1미터 정도의 작지 않은 크기의 이 그림은 실제로 봤을 때 잔인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모습에 편안하게 감상하긴 어렵지만 그만큼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죽은 동물이 단독으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에 띄는데요, 이전에 작품에서의 죽은 동물들은 주로 장르화의 부엌 장면에서 여러 대상들과 함께 배치되곤 했었기 때문이죠. 

어쩐지 핀 조명(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의 도살된 황소를 보고 있노라면 뒤 쪽 문 너머에 도살꾼들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다음 황소를 가지고 들어올 것만 같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기분 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실 때는 빛을 찾아다니며 보면서 그 극적인 감흥을 함께 느끼다보면 더욱 재미가 있을 것같습니다. 나중에 렘브란트의 자화상 시리즈를 다뤄볼까 하는데요, 이는 사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빛을 연구할 때 많이 보는 작품 시리즈이기도합니다. 


하지만 일단 다음 이야기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를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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