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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Sep 09. 2021

달린다고 달라지진 않지만

2달간의 러닝 기록기

뛴다, 라는 것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에 끝나지 않는다. 나에게 뛴다는 것의 목적은 몸을 단련시키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몸을 찢어서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조금 황당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좀 더 얘기해보자.


러닝을 시작한 건 내가 우울감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일에서는 길이 막혔고 보람이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와 그렇게 하나둘씩 먹어가는 나이. 집은 언제 구해야 하고, 연애는 언제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좋아하던 사람과는 잘 안됐고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속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날, 한 인터넷 글에서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뛰라는 글을 봤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뛰는 존재였다. 뛴다는 것은 생존의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보상을 위해 뛸 때 우리 몸에서 긍정적이고 행복한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글이었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인생에 답이 없을 것만 같았다. 처음 뛰기 시작할 때의 나의 모습은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문젠지 모를 만큼 망가져 있었다.


러닝크루에 가입하면 강제성과 동기부여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뛰기 시작했더니 모든 게 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더라, 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동화가 아니었다. 첫 시작에 나는 2km, 3km를 뛰는 것도 벅차서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마음은 앞서는 데 몸은 따라오지 못했다. 이게 해도 늘 수 있는 건지 확신도 없고 하루하루 더 피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운동을 하면 몸이 개운해지고 피로가 풀린다고 하는데, 나는 뛰고 온 날은 온몸이 망치를 맞은 듯 아프고 며칠은 근육통과 피로가 동반되었다.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결과가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매번 모임에 나가고 따로 주 2-3회씩을 더 뛰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결과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나에게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했었고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심장이 터질 거 같고 다리가 너무 무거워도, 그냥 참고 뛰었다.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꾸준히 뛰자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3km->4km->6km->5km->6km->7->8km->9km 점차 거리를 늘려서 뛸 수 있었다. 극적인 변화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거리를 늘릴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도저히 안될 것만 같았다. 이 때도 그냥 참고, 또 참았다. 느리게 뛰어도 절대로 멈추지만은 말자고. 점차 눈에 성과가 숫자로 보이니 재미가 붙기 시작했고 이때부터는 비가 와도 나가서 뛸 정도로 푹 빠지게 되었다.

꾸준히 인스타에 기록했던 러닝 흔적들

그리고 자신감이 붙어 10km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었다. 연습을 위해 혼자 꾸준히 달렸는데 대회 1주일 전부터 극심한 슬럼프가 왔다.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욕심에 내 페이스보다 훨씬 무리해서 뛰는 일이 잦아졌고 극심한 피로도가 쌓였다. 그 결과로 2km도 못 가고 포기하는 일이 생겼고 뛰는 게 두려워졌다. '그래 나 같은 녀석이 어떻게 10km를 뛰겠어? 이게 원래 내 모습이지.' 다시 우울감이 찾아왔고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연습을 안 하면 뒤쳐질 것만 같고, 연습을 하면 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러닝 크루 리더님은 괜찮다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냐는 말에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래서 정말로 대회가 없다는 듯이 쉬고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무작정 채울 줄만 알았는데 때로는 비우는 법도 알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10km를 점령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코스라는 무서움이 있었다. 여러 가지 악 조건 속에서 나는 뛰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참고 또 참았다. 4km 지점부터 이미 더 이상 못 뛸 것만 같았다. 꾹 참고 7km까지 달렸고 이때부터는 정말로 못 뛸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다, 나는 해낸다'라고 되새겼다.


계속 할 수 있다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해낼 것만 같았더. 생각을 입으로 꺼내니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이 힘이 났다. 8km가 넘어가면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다'를 계속 내뱉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달리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무사히 10km 마라톤 완주를 해낼 수 있었다.


다시 혼자로 돌아와 러닝을 한다


마라톤도 러닝 크루도 끝나고 다시 혼자였던 나로 돌아왔다. 마법 같은 2 달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10km는 거뜬히 뛴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던 거리를 가볍게 뛴다. 마라톤 전과 후에 운동량의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운동량은 줄었다. 다만 내 마음이 변한 것이다. 마라톤을 통해 나는 벽을 깼고, 벽을 깨고 나니 그건 벽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10km 들이 있을까. 절대 안 될 것만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들인지 생각해본다면 지금은 너무나도 자신 있게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다. 도전하고 부딪히고 끈기 있게 노력한다면 어떤 것이든 이뤄낼 수 있다고 나는 이제는 확신한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 같았던 내가, 고작 달리기를 했다고 이렇게 달라진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벽은 깨지고 나서야 별 거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벽을 깬 사람만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원시인류는 알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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