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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Oct 21. 2021

부모 끊어내기

악연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

두 곳의 상담소를 거치며 나는 점차 달라졌다. 첫 번째 상담소에서는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틀을 파악하고 사고 틀을 고쳐나가는 것을 배웠고, 두 번째 상담소에서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마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나가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수 차례의 시행착오와 상담에 대한 의심, 원래 상태로 회귀하려는 마음을 계속 다잡아 나가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행복을 찾아서 왔다가 행복해지겠다는 마음마저 내려놓은 완전히 무소유의 감정을 들고 상담을 종료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에 내려가 부모님을 돕기로 했다.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내려가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제는 오랫동안 미뤄뒀던 숙제를 끝내야 했다. 내 마음은 정리가 되었지만 그 모든 원인이자 시작이었던 가족과의 관계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전사가 괴물들을 물리치고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시작했던 태초의 마을로 돌아가 최종 보스와 맞서게 되는 스토리였다. 나는 내 평생에 걸친 투쟁과 이 싸움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다짐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다시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례했고 어머니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형은 어느샌가 아버지를 닮아버렸다. 아버지가 했던 혐오와 경멸의 발언을 어느샌가 그가 내뱉고 있었다. 형은 아버지와 대립했고 어머니를 무시했다. 네 명이 모여서 밥을 먹는 날이면 나는 그 분위기가 주는 차가움에 움츠러 들어서 오늘은 말다툼이 없을지 혼자 떨었다.


당당했던 나는 아버지 앞에서자마자 다시 예전의 조그만 두려움에 떠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경제력을 아버지에 종속되어 있었고, 특히나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그것은 더 심해졌다. 나는 아버지의 스타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구시대의 스타일을 담습 하는 회사 분위기에 숨 막힐 것 같았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근무 스타일과 혼나야 제대로 한다는 마인드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제 멋대로였다. 모든 것을 본인 하에 통제하려고 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본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모두 그녀를 피했다. 그런 성격은 더 심해졌고 이제는 본인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집을 나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내 일과 생활에도 점차 간섭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옆 사람의 표정을 보면 전혀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아무래도 그런 능은 아직도 못 갖춘 것 같다.


나는 같이 살면서 점차 다시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도 붙여보고 살갑게 해보려고 했지만 점차 예전의 나로 돌아갔고 우울감은 심해졌다. 난 무엇도 바꿀 수 없구나, 결국 난 이 정도였구나.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고 그런 생각이 나를 맘대로 두도록 내버려 뒀다. 이 집에 있는 한 나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다짐을 매일 밤마다 하면서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식단도 운동도 바쁘다는 핑계로 내버려 두고 퇴근하면 방에 들어가 싸구려 영상과 혼술로 나를 채웠다.   


그럼에도 나의 질투심은 점차 심해졌다. 형은 사랑받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 모양일까. 나는 가족들을 피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마루에서 얘기할 때 나는 방안에 혼자 들어가 숨었다. 20년 전의 모습을 다시 재현하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과 반대로 혼자 있는 나. 형은 나를 히키코모리라 불렀다. 엄마는 말 없는 벙어리라 불렀다. 똑같았고 나는 도저히 달라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다시 내가 변해야 했다. 어떻게 올라온 행복의 능선인데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나는 집을 이사했다.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했다. 집을 이사하고 독립적 공간이 생기니 다툼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규칙적인 나만의 스케줄을 세울 수 있었다. 식단도 스스로 정할 수 있었기에 건강한 음식들로 다시 나를 채웠다.


그리고 감정일기 쓰기와 내 마음을 다시 체크했다.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우울했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했다. 예를 들어, 내 스케줄이 이미 있는데 무시하고 말 없다가 당일날에 당연히 가족행사에 오라고 했을 때 나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억지로 약속을 취소하고 가족행사에 왔는데 시답잔은 일로 싸우고 있을 때도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계속 기록했다.


또한 용기를 내어 가족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혼자 상처 받아서 방에 들어가 꿍하게 있기보다 말이라도 한번 더 붙여보고 사소한 일상이라도 조금씩 얘기해보려 했다. 나를 무시하더라도 내 얘기를 정확하게 제대로 얘기하고 의견을 말하고자 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를 수 백번 입에 달고 살았다. 억울하지만 내가 다가가고 바뀌려고 시도하고 도전했다. 


그렇게 하자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여행을 가거나 주말에 시간을 보내는 단계까지도 올라오게 되었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정도까지는 나의 마음도 점차 변하게 된 것 같다. 환경도 변해야 했고, 노력도 해야 했고, 내가 먼저 바뀌어야 했던 부분도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몇 년간의 상담과 훈련으로 조금은 단단해진 내 마음은 이제야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근육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왔고, 책상 밑에서 먼지 쌓인 책을 꺼내 탈탈 털어서 마침내 오래된 숙제와 마주했다. 그리고 수차례 도망치고 포기했던 나에서 이제는 기꺼이 그 숙제를 마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나로 바뀌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연은 생각보다 작은 퍼즐 조각 하나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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